[겨를]대화를 늘릴 방책
여름 휴가철을 틈타 도무지 글자를 제대로 읽을 수 없는 나라에 왔다. 오지랖 넓은 성격 덕에 이 나라에도 현지인 친구를 몇명 두고 있는데, 기왕 여기까지 온 김에 메신저로 그 친구들과 대화를 나눌 구실을 열심히 찾아봤다. 그러나 챗GPT를 비롯한 거대 언어모델 기반 서비스들 때문에 모든 핑곗거리를 놓치고 있다.
AI 서비스가 나오기 전이었다면 친구들에게 이런 질문들을 했을 것이다. 현지 뉴스 사진을 찍어서 “이런 화면이 나오는데 무슨 뜻이야?”라고 물을 수도 있고, “내 이름을 너희 언어로 써 줄래?”라고 부탁할 수도 있다. 좀 더 나아가서 “이런 말을 들었는데 어떤 뉘앙스야?”라고 되물을 수도 있고, “왜 이 투어에서는 외국인을 우대해 준 것일까?” “근처에 온천이 많은데 어디가 나에게 제일 어울릴 것 같아?” 같은 물음을 속사포처럼 뱉을 수도 있었다.
이 모든 질의응답을 AI로 할 수 있다는 걸 알고 나니, 우선 용기가 사라졌다. 정확히 말하자면 AI 도구 잘 써서 충분히 궁금증을 해결할 수 있는데, 굳이 구실을 찾아 연락하는 것이 너무 티나는 것 같아 민망했다. 그 친구들도 내가 AI 도구를 아주 잘 써먹는다는 걸 잘도 알기 때문에, 나로선 더더욱 그들에게 연락할 만한 틈새를 찾기가 어려웠다.
이토록 AI 기술이 부흥하기 전이라도, 기술은 사실 일상의 많은 일들을 개인 스스로 해결하도록 도와 왔다. 지도 애플리케이션은 굳이 낯선 이들에게 길을 묻지 않아도 되게 해 주었고, AI 교육 서비스들도 기계와 함께 자습하는 법을 이끌고 있다. 굳이 남들에게 폐 끼치지 않아도, 사람마다 각기 다른 답을 내어놓는 걸 듣지 않아도, 올림픽 종목마다 규칙이 뭔지 한 세트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지 않아도, 이제는 즉시 AI 서비스들에 물어 빠르게 답을 구할 수 있는 시대가 왔다.
우리는 답을 더 쉽게 구할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다. 그래서 일부 AI 서비스들은 “대답을 훨씬 더 잘해주는 툴”로 제품을 부각한다. 그저 묻는 것에 대해 좋은 결과물을 가져다주는 것을 넘어서서, 마치 학구열 높은 부모가 설명해 주는 수준으로 답변을 풀어 써준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쟁이 가속화되면, 우리는 더더욱 주변의 힘을 구하지 않게 될 수 있다. 단지 기술이 쉽고 정확하다는 이유를 넘어서서, 사람 사이 상호작용의 번거로움과 미안함같이 복잡미묘한 감정들을 생략할 수 있으니 얼마나 편리하겠는가.
이번 여행에서도 그랬다.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동네 할아버지 한 명이 지도를 들고 다가왔다. 버스 도착시간을 가르쳐 주겠다고 했는데, 그 호의가 어쩐지 부담스러웠다. 괜히 구글 맵을 켜서 시간표를 재차 확인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여행의 감각도, 타인을 받아들이는 자세도 달라졌다는 깨달음이 여름바람과 함께 훅 다가왔다. 버스에 타서 자리에 앉은 뒤 창밖의 할아버지에게 고마움과 미안함을 담아 고개 숙여 인사했다.
가벼운 대화로 소소한 궁금증을 해소하며 작은 부탁을 주고받는 사이는 구시대의 유물이 될지도 모른다. 이 척박한 환경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기계의 편리함을 이겨내고, SNS상의 잘난 척도 없이, 낯선 이들과의 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할 수 있을까? 이런 과정은 생략되어도 문제가 없는 것일까.
유재연 옐로우독 파트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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