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고사니즘에 꺾이지 않는 낭만 [세상읽기]
조건준 | 아무나유니온 대표
단아했다. 카페에서 노트북을 앞에 둔 그의 인상은 전문 직업인이다. 하지만 늘 불안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며 암울한 심정을 내보였다. 그는 900만명에 육박하는 비임금노동자며 프리랜서다. 바빠서 일상은 들쭉날쭉이다. 평판이 나빠지면 일감을 잃을 수 있기에 고객의 웬만한 갑질을 참으며 아등바등 산다.
생계에 쪼들려 먹고사는 것을 최우선에 두는 것이 먹고사니즘이다. 생존에 허덕이면 다른 것에 눈을 돌리기 어렵다. 그의 상태가 그랬다. 타인을 먹고사니즘에 빠뜨리는 사람도 있다. 밥그릇 걷어차기가 방법이다. 해고가 그렇다. 먹고 살려면 복종하라는 것. 먹이로 통제하는 것은 반려견 행동 교정 프로그램에 흔하게 나온다. 말을 잘 들을 때만 간식을 준다. 이처럼 먹고사니즘으로 하는 일에 낭만이 있으랴.
당신의 낭만은 뭔가. 경치 좋은 데서 노는 것, 붉은 노을 아래 독서, 귀향해서 즐기는 풍류, 스위스 여행, 맘 편한 고주망태, 더 나은 사회를 위해 바치는 목숨 등, 지인들 대답은 다양했다. 낭만은 바라는 것을 향해 고양된 마음이다. 그가 노동력을 팔고 통제받는 직장인 대신 프리랜서를 선택한 것은 자기 방식으로 일하는 자율성 때문이다. 현실을 너무 부풀리면 허세다. 자율에 따르는 불안한 루틴과 수입 등 감수할 것도 있다. 하지만 싸게 부리며 갑질하는 현실은 독하다.
먹고사니즘을 어떻게 벗어날까. 보이지 않는 손을 믿고 시장을 잘 따를까. 프리랜서가 이용하는 플랫폼들은 일의 대가를 너무 떨어뜨린다. 시장에 기댈수록 먹고사니즘의 늪에 빠져 아등바등했다. 능력을 키워 자신의 상품 가격을 올려야 한다지만 자기계발 시간도 돈도 없는데 어쩌란 말인가.
시장이 이러니 국가가 책임지라고 한다. 하지만 이쪽이 잡았다가 저쪽이 잡는 국가권력은 오락가락. 이 와중에 먹고사니즘에서 한자 뺀 먹사니즘이 정치 언어로 등장했다. 빈곤국도 아니고 국민소득이 4만달러에 가까운데 왜 행복을 위한 즐기니즘이 아닌 먹사니즘인가. 국민에게 25만원을 주자는 것에 여야가 티격태격하지만, 불평등 개선에 전혀 도움이 안 된다. 엉뚱하게 종합부동산세를 깎고 금융투자소득세를 없앤다니, 먹고살 만한 사람을 위한 것이 민생인가.
시장은 냉정하고 국가는 무정하다. 이런 현실을 자각할 때마다 낭만은 밟힌다. 냉정한 시장과 무정한 국가 사이에서 낭만은 매 순간 짓눌리고 깨지며 각박한 먹사니즘의 늪으로 돌아온다. 이번 생은 망했다는 ‘이생망’ 좌절을 안고 아등바등 버티는 ‘존버 정신’만 남는다.
그래도 낭만은 강하다. 2023년 진행된 노동자 인터뷰 프로그램에서 프리랜서들은 다른 직업군에 비해 눈에 띄게 돈보다 자유가 중요하다고 했다. 참여자들은 그것을 ‘프리랜서 솔(soul)’이라고 했다. 업종과 프리랜서가 된 경로에 따라 다르지만, 그들의 영혼은 강렬했다. 돈보다 자유! 철없는 ‘갬성’일까. 그것이 프리랜서의 저주라는 것도 안다. 하지만 냉정한 시장과 무정한 국가에 정이 없다. 정은 동료 시민에게 있다. 곁에 있는 너와 나, 프리랜서에게는 프리랜서가 정을 품고 낭만을 나눈다. 정은 긴 진화의 결과다. 이성보다 먼저다. 인간 이성의 결과로 여기는 인공지능(AI)도 갖지 못한 것이다.
딱 1퍼센트면 된다. 낭만이 밟히지 않으려면 계획이 필요하다. 900만명에 육박하는, 권리 사각지대에서 일하는 시민 1%만 뭉치면 상황은 달라진다. 다양한 프리랜서 커뮤니티가 있다. 그러나 일부 업종의 프리랜서 노조는 너무 작고 직종별 협회는 이익단체로서 로비력이나 사회적 영향력도 너무 약하다.
4차 산업혁명을 주도하는 기술권력은 인공지능, 알고리즘, 소프트웨어 개발을 통해 접속하는 노예 노동을 만든다. 프리랜서에게 주체, 자력화 양식, 커뮤니티 개발이 필요하다. 시작은 낭만이 흐르는 다양한 커뮤니티다. 무기력한 직능단체나 기업집단에 묶인 기성노조와 다른 새로운 결사체와 사회행동(Social strike) 개발에 성공한다면, 그들은 권리 사각지대가 아니라 디지털 경제를 넘어설 주체가 될 것이다.
인공지능에 대한 환호가 커질수록,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질문하듯 먹사니즘이 혹독해질수록 낭만이 흐르는 연결은 더 중요해질 것이다. 쉽지 않지만 어렵지 않다. 시장의 냉정, 국가의 무정을 탓하기보다 서로의 다정함에 주목하자. 이것이 낭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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