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벼락의 웅변가와 철학자 [이명석의 어차피 혼잔데]
이명석 | 문화비평가
소나기가 그치자 뚝뚝 떨어지는 능소화 사이로 길을 나섰다. 공원, 강변, 에어컨 씽씽 나오는 쇼핑가도 좋지만, 나는 ‘안 가 본 골목’이 제일 재미있다. 골목 산책에도 여러 테마가 있다. 특이한 벽돌담만 찾아다니는 건축 산책, 나혜석이 말년을 보낸 무연고 병동터를 찾는 역사 산책, 경로당 화단 뒤의 수상한 꼬리를 좇는 길고양이 산책…. 그런데 요즘의 나는 담벼락의 글자들에 꽂혔다.
‘부탁 드립니다. 꽃들이 숨쉬게 오토바이를 옮겨 주세요.’ 스티로폼에 매직펜으로 날려 쓴 글씨. 대부분의 행인들이 무심코 지나칠 글 쪼가리지만, 글에 대한 직업적 집착 때문일까, 내겐 꽤나 흥미로운 대상이다. 담벼락 글은 한두 문장으로 이뤄진 실용 글쓰기의 일품요리랄까? 아니 정확한 대상과 취향을 위한 맞춤 요리, 오마카세일 수도 있다.
나는 스마트폰에 수집해둔 담벼락 글들을 둘러본다. 담배, 주차, 쓰레기, 소음 등 골목길의 문제들이 가장 많고 화초, 개똥, 고양이밥 등 동식물에 대한 내용이 늘어나고 있다. 예전엔 이런 문제에 부딪히면 “개 짖는 소리 안 나게 해라.” 소리지르거나 담 너머로 물을 끼얹는 물리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이제 그런 식의 대면 해결은 어렵다. 동네 터줏대감들의 텃세가 허물어지고 이웃끼리 인사도 하지 않는 세상이니, 자칫 경찰을 부를 일이 생길 수 있다.
그래서 종이와 펜을 꺼냈는데, 불과 한두 문장으로 낯 모르는 이를 설득하기란 쉽지 않다. 고심 끝에 이런저런 문체들을 동원한다. 무덤덤하고 건조한 지시, CCTV와 실정법을 들먹이는 경고, 조곤조곤한 설득과 애원…. 가장 눈에 뜨이는 방법은 격한 감정을 더한 반협박이다. ‘쓰레기를 버리는 당신이 쓰레기’ 정도는 약과다. 찢은 달력 뒷면에 휘갈긴 글씨로, 갓 출옥한 사람이 ‘내가 사고 안 치고 조용히 살아보려는데’라는 어투로 쓰면 효과적이라는 말도 들었다.
반대로 어떻게든 상대를 불쾌하게 하지 않으려는 마음도 볼 수 있다. ‘귀여운 강아지, 응가도 데려가세요. 사랑합니다.’ 어떻게 응가까지 사랑하겠나? 잘 치우라는 거지. 머리를 조아리는 읍소도 있다. “제발! 외출하시면 강아지가 너무 짖어 힘들어요.” 며칠 뒤에 깨알 같은 답이 붙었다. “저희 아니에요. 옆 건물 웰시코기 같아요. ㅠㅠ” 경로당 텃밭에는 반어적 유머가 자주 보인다. ‘농약 살포 완료. 따먹으면 배 아플겨.’
보통은 주어를 생략하지만, 자신을 드러내며 상대의 마음을 움직여보려는 경우도 있다. 전봇대에 아이들이 얼기설기 쓰고 그린 포스트들이 붙어 있다. ‘담배 금지! 여기는 어린이집, 우리가 놀고 있어요.’ ‘우리가 버린 쓰레기로 지구가 아파요.’ 웬만한 냉혈한이 아니면 돌아설 거다. 어느 골목 화단에선 정반대의 주인공을 만났다. ‘산소, 꽃향기 마시세요. 건강, 기분 회복되어 가세요. 꽃 좋아하는 백발 할머니.’ 조곤조곤 덕담을 전하는 듯하지만, ‘백발 할머니’라는 이름이 등골을 시원하게 한다. 화초에 손 대는 놈은 백발마녀 같은 영험한 능력으로 혼구녕을 내주겠다는 게 아닐까? 할머니는 꽃 이름도 꼼꼼이 적어 두셨다. ‘천사의 나팔’ 옆에 ‘독말풀’. 잘못 건드렸다간 천사들이 나팔 불고 나타나 독화살을 날릴 것 같다.
화창한 날씨 속에 화창하게 부서지는 담벼락들도 만난다. 얼마 뒤엔 저기에 깔끔한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겠지. 모든 민원을 관리인에게 일임할 수 있는 매끈한 세계. 하지만 거기에 들어가지 못한 골목길엔 울퉁불퉁한 다툼들이 있고, 자신의 담벼락을 지키려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기자, 웅변가, 나아가 시인과 철학자로 만든다.
언젠가 서촌 통인시장 뒷골목에서 이런 글귀를 만났다. ‘이곳에 아무 것도 놓지 마세요. 걸리적거려서 불편합니다.’ 관광객들이 늘어나며 음료 쓰레기와 잡동사니에 시달린 걸까? 아니면 무엇으로부터도 방해받고 싶지 않은 존재의 근본적인 갈망을 표현한 걸까? 나는 저 글귀의 사진을 한동안 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의 헤더 담벼락에 붙여 두었다. 주인장의 허락을 받아 티셔츠에 새겨 입고 다닐까 생각도 했다. 어떤 할머니가 입고 다녀 유명해진 티셔츠처럼 말이다. ‘부딪치지 마라. 덥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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