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개인화에도 ‘자기 학대의 대물림’은 멈추지 않는다 [왜냐면]

한겨레 2024. 8. 14.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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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올림픽이 끝났다.

방송사는 올림픽 특수를 맞아 편성표를 바꿨다.

드라마와 예능을 잠시 쉬고, 황금시간대에 올림픽 생중계를 전면 배치하였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올림픽 개막식 방송3사 시청률을 다 합쳐도 3% 미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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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이 101일 앞으로 다가온 지난 5일 오후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마산고등학교 3학년 교실에서 수험생들이 자율학습하고 있다. 연합뉴스

릴레이 기고 ‘변호사들의 교육 이야기’ ②

이지연 | 변호사

파리 올림픽이 끝났다. 방송사는 올림픽 특수를 맞아 편성표를 바꿨다. 드라마와 예능을 잠시 쉬고, 황금시간대에 올림픽 생중계를 전면 배치하였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올림픽 개막식 방송3사 시청률을 다 합쳐도 3% 미만이었다.

가족들이 다 함께 텔레비전(TV) 앞에 옹기종기 모여앉아서 개막식을 보고, 우리나라를 대표해 출전한 선수의 경기를 보며 마치 내가 출전하는 것처럼 마음 졸이며 응원하는 시대는 저물어 가고 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국가대표 선수의 우승이 더 이상 나의 우승처럼 느껴지지 않는 이유도 큰 것 같다. 과거에는 ‘국가대표 선수와 나’를 ‘국가’라는 하나의 끈으로 묶기가 쉬웠다면 지금은 그 끈이 헐거워지고 틈이 꽤 벌어지고 있다. 어쩌면 우리는 집단주의를 벗어나 개인주의로 빠르게 전환 중인지도 모른다.

나는 1980~90년대 학교에 다녔다. ‘나’보다 ‘우리’가 더 중요했고, 튀는 것은 환영받지 못했다. 1명이 잘못하면 반 전체가 혼나기도 하고, 전교생이 대청소하는 날도 따로 있었다. 책상 위에 의자를 올리고, 왁스와 마른 걸레로 나무 바닥 교실을 반짝반짝하게 만들었다. 학교에 방문할 장학사를 위해, 장학사를 맞이할 교장 선생님을 위해, 담임 선생님을 위해, 그 무엇보다 우리 학교와 우리 반을 위해….

그러나 우리는 전체주의나 집단주의를 벗어나, 빠르게 개인주의인 나를 향하고 있다. ‘우리 반’ ‘우리 학교’ ‘우리나라’라는 우리의 개념은 차츰 희미해진다. 그래서인지 국가대표 선수가 금메달을 따면 ‘나의 기쁨’처럼 기뻐하기보다 ‘그를 축하’해주는 느낌으로 변한 것 같다.

개인주의가 강해질수록, 올림픽에 참가한 선수처럼 개인들은 저나마 긴장하고 경쟁한다. 더 좋은 학교, 더 나은 직업, 더 훌륭한 배우자, 더 비싼 집을 위해서 ‘더’ 노력한다. 더 오르지 못한 것은 개인의 노력이 부족한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은 미래의 ‘더’를 위해 현재의 ‘나’를 학대한다. 학대는 나에게서 그치지 않고 자녀에게로 대물림된다. 그래서 그런지 부모들의 자녀 교육은 더 심해지고 있다. 아이들은 주 중에 학원을 4~5개 다니는 것은 기본이고, 주말에도 역사체험, 과학실험 등 다양한 사교육을 받는다. 아이들이 배우는 과목도 다양하다. 국어, 영어, 수학은 기본이고, 태권도, 피아노, 논술, 한국사, 과학, 축구, 수영, 폴댄스 등…. 그러나 다양한 과목만큼, 아이들의 꿈이 다양한 것은 아니다. 아이들은 자신도 모르게, 누군가의 욕망을 복사한 것처럼, 돈 많은 부자가 되기를 원하거나 인기 많은 아이돌을 꿈꾸고 있었다.

국가나 가족이라는 끈이 헐거워지고, 핵가족화를 지나 핵개인화로 진행되고 있음에도, 왜 우리는(아니 왜 개인은) 비슷한 꿈을 꾸고 왜 같은 것을 욕망할까? 쓸데없는 고민을 하던 중, 마음을 울리는 한 구절을 발견하였다. “우리는 왜 원본으로 태어나서 복사본으로 죽어가는 것일까?” 18세기 영국의 시인 에드워드 영이 한 말이라고 한다.

권민 작가가 에드워드의 글을 평서문으로 바꾸고 몇 구절을 더 보태었다. “우리 모두는 원본으로 태어나서 대부분은 복사본으로 죽어간다. 당신은 누구의 복사본인가? 자기다움으로 자신의 인생을 살라!” 나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필요한 말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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