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이규준 평전’ 펴냈다…후손 김창희 가족의 광복절 맞이
비밀결사조직 활동하다 33살에 요절
일흔아홉 번째 광복절을 앞두고, 독립운동가 이석영 선생(1855~1934, 이하 호칭 생략)의 증손녀 김용애(89)씨와 그 아들 김창희(55)씨 가족의 마음은 뿌듯함과 씁쓸함이 복잡하게 뒤섞였다. 가족으로선 윗대 조상의 숭고한 희생을 기억하는 기념일이다. 최근 몇 년 새 자축할 만한 경사도 잇따랐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론 나라 돌아가는 형국이 개탄스럽다. 윤석열 정부가 독립기념관, 한국학중앙연구원, 국사편찬위원회, 진실·화해 과거사위원회 등 역사 관련 국가 기관들의 수장을 항일 독립운동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역사를 왜곡해 ‘친일파’라는 비판까지 듣는 인물들로 채우고 있어서다.
김씨 가족은 조선의 명문가 출신 관료이자 당대 최고 부자로 독립운동에 모든 것을 바쳤던 이석영의 직계후손이다. 일본이 조선을 강제합병한 직후인 1910년 12월, 이석영을 비롯한 6형제와 가족들은 전 재산을 처분한 뒤 서간도로 망명해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독립운동을 했다. 김용애씨는 이석영의 장남이자 요절한 독립운동가 이규준(1896~1928)의 외손녀다. 이규준은 독립운동 자금 마련과 밀정 처단에 앞장선 비밀결사 조직 다물단에서 활동하다 일경에게 붙잡혀 옥고를 치렀으며, 서른셋 젊은 나이에 사망 경위가 석연치 않은 삶을 마감했다. 이석영-규준 부자는 광복 후 건국훈장을 추서 받았다. 불과 3년 전까지만도 이석영의 후손은 규준·규서 두 아들을 끝으로 절손됐다고 잘못 알려졌다. 그러나 2021년 여름 ‘한겨레21’의 집중 취재·보도와 김창희씨 부부의 끈질긴 자료 추적으로 그 직계후손 다수가 생존한 사실이 ‘공식적으로 확인’됐다. 국가보훈부(당시는 보훈처)는 이듬해인 2022년 2월 뒤늦게 김용애씨와 이종사촌 자매들을 독립유공자 후손으로 인정했다.
올해 6월에는 이석영-규준 부자가 사별 이후 거의 100년 만에 영혼으로나마 상봉해 함께 영면하게 됐다. 이규준의 위패가 서울 동작구 국립현충원의 이석영 위패 옆에 나란히 봉안된 것이다. 그전까지 이규준은 이석영 일가와의 가족관계를 증명해줄 제적등본이 없다는 이유로 위패조차 모셔지지 않았었다. 형식적이고 소극적인 관료주의의 장벽은 여전히 높다.
김씨 가족에게 기쁜 일은 또 있었다. 1945년 해방 직후 백범 김구는 이규준의 딸(김용애씨의 친모)과 그 가족에게 일본인이 남기고 간 서울 쌍림동 적산가옥에서 안중근 의사의 혈족과 함께 살도록 배려해주었는데, 올해 2월 김용애는 어렸을 적 그 집에서 4년가량 함께 살다가 한국전쟁 난리 통에 흩어져 소식이 끊겼던 안중근의 종손(從孫·형이나 아우의 손자) 권혁우(80)씨 가족과 70여년 만에 재회하는 기쁨을 누렸다. 김창희씨 부부가 어머니의 기억을 증명하려 수소문하던 중, 마침 부산에서 권씨가 자신의 할머니이자 안중근 의사의 여동생 안성녀의 ‘독립유공자 인정’을 위해 애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돼 연락이 닿았다. 안성녀도 독립군 군복을 만들고 독립운동자금을 전달하는 등의 활동을 했지만 이를 입증할 ‘공식 문서’가 없어 독립유공자 서훈을 못 받고 있다.
김창희씨가 증조부의 굵고 짧은 삶을 되살린 ‘이규준 평전’(이글루 펴냄)도 2년여의 조사와 집필을 거쳐 이제 막 출간됐다. 역사 전공자가 아닌 데다 금융투자업체 대표로 바쁜 그가 독립운동가 평전을 쓰겠다고 나선 것은 사명감에서였다. “이석영-규준의 후손이 ‘멸절’됐다는 잘못된 이야기는 어머니를 비롯해 살아 있는 후손들의 가슴에 날카로운 못이 되어 박혔다. (…) 두 분 할아버지가 남긴 삶의 자취를 부정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왜곡과 오류를 바로잡아야 했다.”(머리말).
시작은 막막했다. 이규준에 대한 공식기록이라곤 독립유공자 공적 조서에 기록된 단 한 문장과 일제의 수사 기록 조각들밖에 없었다. 김씨 부부는 집안 족보부터 ‘승정원일기’, 일제 총독부, 국가기록원, 독립기념관 등의 공문서들을 샅샅이 뒤져 자료를 수집하고 미세한 퍼즐 조각들을 맞춰나갔다. 그 과정에서 이규준이 명성황후의 친정조카인 민영익의 아들 민정식이 상하이에 망명했을 때 임시정부 요원들과 함께 일제의 민정식 검거를 막는 보호 작전을 수행했던 사실, 1925년 3월1일 ‘기미 독립선언’ 6주년을 맞아 중국 톈진 시내에서 태극기를 휘날리며 통쾌한 자동차 행진 시위를 했던 사실을 처음 밝혀내기도 했다. 김씨는 “외증조부 이규준과 그 가족의 삶을 되살려낸 이 책이 이름 없이 스러져간 수많은 독립운동가와 그 후손들이 자신의 이름을 되찾아가는 또 하나의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고 밝혔다.
광복절을 사흘 앞둔 12일 저녁, 서울 종로구 김창희씨의 집에는 반갑고도 귀한 손님이 찾아왔다. 앞서 언급한 안중근의 종손(從孫) 권혁우씨 부부였다. 권씨는 부산의 초·중·고등학교 역사 교사들과 학생 40여명이 일제 강점기 항일독립운동의 발자취를 찾아가는 역사기행에 초청받아 닷새 일정으로 중국 하얼빈, 다롄, 뤼순 감옥을 돌아보고 막 귀국한 참이었다. 김용애씨와 권혁우씨는 70여년 전 어린 시절의 기억을 더듬으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화제는 윤석열 정부와 뉴라이트 집단의 노골적인 역사 왜곡과 친일 행각에 대한 성토로 이어졌다.
권씨는 “대한민국의 정통성은 1919년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비롯한다는 건 헌법 전문에도 나와 있는데, (뉴라이트 세력의 주장대로) 이를 부정하고 1948년 8월15일(이승만 정부 출범일)을 건국절로 하게 되면 친일파가 독립유공자가 되는 거다. 그러면 엄한 시절 목숨까지 바쳐가며 독립운동을 하신 분들은 뭐가 되나”라며 “아직도 친일파 세력이 구석구석 판을 치고 있다”고 개탄했다. 김용애씨는 “15일 정부가 주최하는 광복절 기념행사에 초청받았지만 가지 않겠다”고 했다. 한편, 광복회와 독립운동단체연합은 윤석열 정부의 몰역사적 퇴행에 항의해 올해 광복절 기념행사를 서울 용산구 백범김구기념관에서 따로 거행할 예정이다.
조일준 선임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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