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밝으면 쓰레기속에서도 꽃을 본다네

한겨레 2024. 8. 14.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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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사베이

극한 대립과 갈등의 시대, 반목과 혐오와 배제의 문화가 사회 전반을 뒤흔든다. 사람들은 다툼이 발생하면 화합과 상생을 들고나온다. 갈등의 중재자들은 화합을 위하여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는 주장을 내려놓고 중도적 관점에서 풀기를 권고한다. 그래서 여당과 야당, 진보와 보수의 정치 구도에서 중도를 표방하는 제3정당이 출현한다. 그런 예로 어느 한 시절 중도정치를 내세운 참신한 정치인이 혼란스러운 정치권의 대안으로 환영받은 적도 있다. 그럼에도 중도정치는 성공하지 못하고 여전히 모색과 실험의 차원을 넘어서지 못한다. 우리 사회 곳곳에서 ‘중도’는 문제해결의 대안으로 떠오르기도 하지만, 어떤 이들은 ‘대체 중도의 정체가 뭐냐’는 직설과 비난을 퍼부으며 손에 잡히는 중도 정책을 내놓으라 한다. 심지어 영국 속담에 ‘정책에 있어 중도는 고속도로 중앙선에 서 있는 것처럼 위험하다’는 말도 있다.

중도(中道), 불교에서 이토록 사랑받으면서 동시에 논쟁의 대상이 되는 말도 없을 것이다. 왕궁에서 29년을 왕자의 신분으로 살았던 고오타마 싯다르타는 행복을 추구한다면서 극단적인 삶을 사는 적나라한 모습들을 목격했다. 특히 귀족들은 재물을 쌓으며 먹고 마시면서 자신들의 감각을 무한대로 만족시키려 했다. 반면에 어떤 부류는 감관을 지나치게 통제하고 도덕적 금욕에 매몰되어 자신을 괴롭히거나, 복잡한 현실을 벗어나 정신 집중에만 전념했다. 싯다르타는 그런 지향과 모습이 고요와 청정, 평온과 기쁨의 성취라는 열반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음을 깨달았다. 싯다르타는 출가 이전에 이미 허위와 거짓, 부도덕과 감각에 취하는 삶을 모두 버렸다. 당시 고행주의자들은 감각기관을 극단적으로 억압하면서 몸의 균형을 깨뜨리면서 수행을 했고, 싯다르타는 그 방법도 버렸다. 몸과 정신이 건강하고 맑은 상태를 유지하도록 수행정진하여 마침내 모든 고뇌를 완전히 제거하고 평온과 기쁨이 충만한 열반을 성취하였다. 이름하여 붓다, 깨달은 사람이 된 것이다. 불전에서는 이를 극단적인 사상과 삶의 방식을 버리고 조화와 균형을 이룬 중도적 실천이라고 말한다.

서양철학과 중국철학의 중도는 불교에서 지향하는 중도와 다르다. 이른바 덕의 윤리로써 중용을 언급한다. 아리스텔레스는 중용이란 행동에서 과잉과 결핍을 지양하고 균형과 조화를 지향하며 행복으로 가는 길이라고 했다. 중국에서도 공자의 손자 자사는 ‘중용’(中庸)이라는 저서에서 조화와 균형을 강조했다. 공자의 말을 기록한 ‘논어’ ‘옹야’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중용처럼 사는 덕은 지극한 것이다. 일반인들은 그렇게 사는 사람이 적은지 오래되었다.’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인 소동파는 중용의 맥락을 이렇게 강조했다.

“그대는 배움에 힘쓸진저! 학문은 온축에 힘써야 하고 이어 쓰임에는 여유가 있어야 한다. 널리 보되 핵심을 간추려 취하고(博觀而約取_박관이약취), 두텁게 쌓되 얇게 펴는 것(厚積而薄發_후적이박발)이 중요하다.”

참으로 간명하다. 내가 순발력이 있고 뭘 좀 잘 풀어내는 재주가 있는지라, 생각과 아이디어를 여지없이 쏟아내는 버릇이 있다. 박관약취는 잘 되는데 후적박발은 늘 취약하다. 나는 후적박발을 평상시 말과 글과 행동에서 유념하고자 노력한다. 늘 경계하고 경계할진저!

다시 불전에서 중도를 살펴보자. 붓다의 친설에 가까운 초기경전은 수행에서 이치도 맞지 않고 결과도 바람직하지 않은 극단과 편향을 버리라고 한다. 붓다의 입멸 이후 기원 전 1세기 전후에 출현한 대승불교 불전은 중도의 대상과 해석에 전환을 가져온다.

초기 불교는 극단을 버리고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 가장 적확한 길이 중도이며, 그 구체적인 실천 방법은 팔정도라고 한다. 나와 세계에 대한 견해(正見), 정견에 입각한 경향적 사유(正思), 언어 행위(正語), 바른 행위(正業) 등이 팔정도이다. 편견을 버리고 몸과 마음과 행위를 팔정도로 잘 살피라는 것이다. 이것이 초기 불교의 실천적 중도이다.

반면, 대승불교는 반야 사상에 기반한다. 반야란 초월적 지혜, 공성(空性)의 지혜이다. 언어와 사유의 허구성을 직시하고, 그것이 모습과 이름을 갖기 이전의 공성을 통찰함으로써 집착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가르친다. 대승불교의 중도 개념 역시 이러한 반야 사상 안에서 정립된다. ‘반야심경’에는 ‘이름과 모양과 작용이 있는 모든 법(존재)은 공성이어서, 본디 발생함도 소멸함도 없으며(불생불멸), 오염됨도 청정함도 없고(불구부정), 늘어남도 줄어듦도 없다(부증불감)’고 나와 있다. 공성과 반야의 눈으로 사물을 보면 어떤 존재도 단독으로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반드시 여러 조건의 어울림으로 존재한다. 세상 모든 존재는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다‘는 연기의 법칙 안에서 성립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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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불교가 팔정도를 통한 실천적 중도를 강조한다면, 대승불교의 중도는 ‘존재를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견(見)’에 방점을 둔 사상적 중도를 강조한다. 임제 의현 선사는 ‘임제록’에서 “나는 다만 그대의 견해를 묻을 뿐이다.”라고 했다. 그럼 어떻게 보는 것이 중도의 견해인가?

여기 쓰레기장과 꽃밭이 있다고 하자. 악취가 풍기는 쓰레기장을 어떻게 볼 것인가? 답은 동시적 시선으로 보는 것이다. 악취가 심한 쓰레기가 모여 쓰레기장이 된 모습(相)만 보지 말고, 쓰레기들이 모이기 이전의 모습(無相)을 같이 보는 것이 동시적 바라봄이다. 중도로 본다는 것은 인연으로 ‘있음‘과, 인연이 있기 이전 혹은 인연이 소멸한 뒤의 ‘없음’을 같이 보는 것이다. 꽃밭을 바라보는 시선도 이와 같다. 연기적으로 보면 모든 존재의 성립과 소멸은 동시성이고, 이 동시성의 견해가 사상적 중도이다.

월암 스님의 ‘전등수필’에는 반야 사상에 기반해서 선종 불교 중도관을 설명하는 글이 있다. 존재의 모습을 상(相)과 무상(無相)으로 보는데, 어떤 존재는 상으로 보고 다른 존재는 무상으로 보라는 뜻이 아니다. 하나의 존재를 상과 무상으로 동시에 보라는 뜻이다. 이를 그릇에 담긴 물에 비유하면, 물은 일정한 형태가 없으나(無相) 그릇에 담기면서 일정한 형태(相)를 갖는다. 형태를 지니기는 하지만 그것은 실로 그릇의 형태일 뿐 물의 형태는 아니다(無相). 상(相)이란 무상(無相)의 상이며, 무상은 상의 무상이다. ‘반야심경’에서도 상(相)인 오온(五蘊)이 무상(無相)인 공과 다르지 않다고 했으며(不二), 이 둘은 결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중도적 관점인 동시적 시선의 예를 사람에게 옮겨보자. 어떤 사람이 매우 침울하고 폭력적 성향을 예고 없이 노출시켜 주변 사람들이 그 사람 때문에 받는 고통이 크다. 우리는 그 사람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멸시의 대상으로, 무관심의 대상으로, 혐오와 배제의 대상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또는 저 사람은 태생과 본성이 그러하니 결코 고칠 수 없다고 할 것이다. 어떤 사람은 그도 본심은 그리 나쁜 사람이 아니니 잘 살펴야 한다고 한다. 누구 말이 맞을까?

상(相)과 무상(無相)으로 그 사람을 보면 어떨까? 편견과 편향 없이 그의 모습(相)을 잘 살펴야 한다. 현재 그 사람은 정서가 매우 불안하여 돌발적인 행위를 한다. 당사자도 괴롭고 주변 사람들도 힘들다. 허나, 그 사람과의 관계나 자신의 취향에 따라 시선에 가감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의 행위는 왜 저럴까 편견 없이 생각해야 한다. 침울하고 폭력적인 행위(相)는 처음부터, 타고난, 고정된, 영원한 모습일까? 아니면 어린 시절부터 이어진 환경이 그런 성격을 만든 것은 아닐까?

답은 그의 그런 모습은 ‘만들어진 것’이지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다(無相). 이렇게 한 사람을 상과 무상이라는 동시적 시선으로 보면 우리는 현재 보이는 그의 모습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거두지 않을 수 있다. 본래 있지 않은 공성(空性)이니 현재 여러 조건으로 말미암은 모습(相)은 결코 본래적인 것도 아니며 영원한 모습도 아니다(無相). 이렇게 반야, 공성은 최고의 지혜이며 자비심의 다리이다. 그래서 달라이 라마는 그렇게도 보리심, 공성, 자비를 강조하는 것이 아닐까?

불교에서 중도는 일반에서 말하는 중도층의 중도가 아니다. 다툼에서 기계적 중재가 중도는 아니다. 다만 중도적 시각에서 중재가 있을 뿐이다. 때로는 보이는 모습과 행위를 잘 보고 어느 편을 확실하게 드는 결단이 중도적 행위가 될 수 있다.

중도에 대해 보다 깊은 논의가 필요하지만, ‘중도’라는 언어에 묶여 저마다 자기 식대로 해석하는 오류는 없어야 한다. 대승불교에서 중도는 지금 여기 있음(有)과 본래 있지 않음(空)을 동시적으로 보는 ‘견(見)’이다. 잘 보면 잘 풀린다.

법인스님(전남 화순 불암사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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