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년 적폐’ 방통위, 대수술 시급하다 [저널리즘책무실]
이종규 | 저널리즘책무실장
막장 드라마가 따로 없었다. 한치의 실수도 없이 주어진 역할을 소화해내고 홀연히 사라지는 단역 ‘악당’들이 있어서 드라마는 더욱 빛났다. 뻔한 스토리이지만, 욕하면서 보는 게 막장 드라마의 속성 아닌가.
윤석열 정부 들어 사생결단의 전쟁터가 된 방송통신위원회 얘기다. 방통위가 이렇게까지 정치의 중심에 선 적이 또 있었나 싶다. 도돌이표 같은 ‘탄핵안 발의-자진 사퇴’ 소동을 지켜보며 국민들도 의아해했을 것 같다. 도대체 왜 저렇게까지 하나.
방통위가 정쟁의 최전선이 된 이유는 단 하나다. 공영방송 사장을 갈아치울 권한 때문이다. 한국방송(KBS)은 이사회의 제청으로 대통령이 사장을 임명하고, 문화방송(MBC)은 대주주인 방송문화진흥회 이사회가 선임한다. 이사회가 사장 선임의 키를 쥔 셈인데, 이사 임면권을 가진 곳이 바로 방통위다. 방통위가 방송 장악의 교두보로 여겨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방송 장악에 진심인 윤석열 정권이 이를 모를 리 없다. 여권은 집권 직후부터 전 정권에서 임명된 한상혁 방통위원장을 내쫓지 못해 안달했다. 정권 차원의 ‘한상혁 찍어내기’는 집요했다. 방통위법은 방통위의 독립성을 위해 위원 임기를 보장하고 있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윤 대통령 취임 한달째인 2022년 6월, 권성동 국민의힘 원내대표가 포문을 열었다. 그는 한 위원장을 지목하며 “대통령이 바뀌었으면 국정과제에 동의하지 않는 분들은 물러나는 게 맞다”며 사퇴를 압박했다.
한 위원장이 버티자 사정기관이 나섰다. 검찰은 먼지털기식 수사로, 감사원은 대대적인 감사로 방통위를 옥죄어갔다. 오죽했으면 방통위 노조가 성명서를 내어 “방송 장악을 위한 인신공양이 필요한가?”라고 항변했겠나 . 결국 검찰은 지난해 5월 한 위원장을 불구속 기소했고, 윤 대통령은 기소를 이유로 그를 면직했다. 최대 걸림돌이 제거되자 공영방송 이사회 물갈이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방통위원 결원이 생기면 대통령 몫은 임명하고 야권 몫은 임명을 미루는 방식으로 방통위 구도를 여권 우위로 개편한 뒤, 여권 몫인 김효재 위원장 직무대행이 이끄는 3인 방통위 체제에서 양대 공영방송 이사장을 잇따라 해임했다.
김효재 직무대행이 임기를 마치고 이동관 위원장이 취임한 이후 방통위는 줄곧 위법 소지가 있는 ‘대통령 몫 2인 체제’로 운영됐다. 그 와중에도 방송 장악을 위한 중요한 의결이 감행됐다. 그때마다 야당은 탄핵으로 맞섰고, 방통위원장들은 ‘꼼수 사퇴’로 후임자가 공백 없이 방송 장악을 이어갈 수 있는 길을 열어줬다. 하루라도 빨리 ‘땡윤 방송’을 만들기 위해 장관급 공직을 총알받이로 쓴 거나 다름없다.
방통위가 방송 장악 도구로 악용될 것이라는 우려는 설립 논의 단계부터 나왔다. 이명박 정부 출범 직전인 2008년 2월, 여야가 방통위법에 합의하자 언론노조는 성명서를 내어 정치권을 강한 어조로 규탄했다. 성명서 제목이 ‘시일야 방송대곡’이었다.
“오호통재라. 방송 독립이 기어이 죽음으로 내몰리고 말았다. 여야 정치권이 이명박 정권의 정부조직 개편안에 야합하면서 방송의 독립과 자유를 지켜야 할 방송통신위원회를 대통령 직속 공무원 기구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성명서 내용 중 가장 의미심장한 대목은 “정권에 충성스러운 방송에는 전리품을, 정권의 눈 밖에 난 방송에는 철퇴를 내릴 수 있는 무기가 대통령의 손아귀에 쥐어졌다”는 표현이다. 이런 우려는 이명박 정권을 거치며 현실이 됐다. 10여년이 흐른 지금 윤석열 정권은 다시 그 무기를 빼들어 언론 자유를 무참히 훼손하는 중이다.
당시 언론노조가 거세게 반발한 이유는 크게 두가지였다. 방통위가 ‘대통령 직속 기구’로 설치되는데다 대통령이 위원장을 포함한 상임위원 2명을 직접 임명하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합의제’는 껍데기만 남고, 대통령의 의중이 그대로 관철되는 사실상의 독임제 부처로 운영될 게 뻔하다는 우려였다. 지금 방통위에 쏟아지는 비판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현 정부 들어 방통위가 ‘방송 장악의 주구’ 노릇을 하면서, 현재의 방통위 체제를 유지해서는 ‘방송의 자유’와 ‘방통위의 독립적 운영’ 보장이라는 방통위법의 입법 목적을 달성하기 어렵다는 사실이 더욱 분명해졌다. 이제 근본적인 해법을 모색할 때다. 중립성이 요구되는 조직 특성을 고려해 특정 정치세력이 위원의 다수를 점할 수 없도록 하거나, 헌법 또는 법률상 독립기관의 위상을 부여하는 방안 등 그동안 정치권에서 논의된 대안들이 적지 않다.
여당도 무조건 반대만 할 일은 아니다. 정권이 교체되면 현재의 야당이 똑같은 방식으로 방송 장악에 나서지 말라는 법도 없지 않은가. 어떤 정권이 들어서더라도 공영방송을 쥐락펴락할 수 없도록 하는 것이 모두에게 이롭다.
저널리즘책무실장 jk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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