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줏대감이 돌아왔다 [이종건의 함께 먹고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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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줏대감.
집터를 지키는 신이란다.
그 옛날 장독대에 물 떠다 놓고 기도하던 풍속이 바로 이 터주신, 터줏대감에게 비는 것이라니 그 친숙함과 위상이 알 만하다.
터가 무의미해진 도시에 더이상 신령한 터주신은 계시지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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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건 | 옥바라지선교센터 활동가
터줏대감. 집터를 지키는 신이란다. 그 옛날 장독대에 물 떠다 놓고 기도하던 풍속이 바로 이 터주신, 터줏대감에게 비는 것이라니 그 친숙함과 위상이 알 만하다. 터가 무의미해진 도시에 더이상 신령한 터주신은 계시지 않은 것 같다. 터무니가 새겨지기도 전에 사람들은 쫓겨나듯 옮겨 다닌다. 이제 좀 신령할까 싶은 오래된 골목이라면 어김없이 젠트리피케이션이 들이닥친다. 터주신이 있다면 한숨을 깊게 내쉬곤 어딘가로 떠났을 테지.
그런 도시를 살아가면서도, 우리는 종종 터줏대감들을 만난다. 휙휙 바뀌는 풍경 속에서도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 도시의 터줏대감들. 을지로에는 을지면옥과 을지OB베어가 있었다. 1985년 을지로에 자리를 잡아 반백년 노포가 다 되어가는 을지면옥은 마니아들에게 일종의 성지였다. 쨍하게 맑은 국물에 무심하게 고춧가루가 툭툭, 파 고명 몇 개가 잘게 썰려 얹혀 있는 여백의 냉면. 일단 나오면 면을 풀어헤치지 말고 그대로 들어 국물을 들이켠다. 보이는 그대로의 맛이다. 날 듯 말 듯 육향이 스쳐 지나가다 혀를 꽉 붙잡는. 이내 면을 풀어헤쳐 먹기 시작하면 무심한 고춧가루가 약간의 존재감을 뽐내며 개성을 더한다. 혼술, 혼밥이라는 말이 없던 시절부터 이곳에는 백발의 노인들이 소주 한 병에 냉면 한 그릇을 운치 있게 즐기는 곳이었다. 길 하나만 건너면 을지OB베어가 있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생맥줏집, 1982년부터 영업하며 인근 공구거리 사장들의 사랑을 받아온 가게. 무려 ‘노가리와 맥주’라는 불문율을 처음 개발한 곳이다. 당시 막걸리보다 비싸 노동자들의 외면을 받아온 생맥주를 저렴한 안주와 곁들여 팔아 공구거리의 솔푸드로 만들었으니, 요식업계에 끼친 공로가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두 가게 모두 정부에서 지정한 백년가게였다. 극렬한 근현대사를 겪으며 오랜 전통을 유지할 힘이 없던 이 나라에서, 끝끝내 살아남아 마침내 백년을 버틸 가게들. 을지면옥은 재개발로 쫓겨났고, 을지OB베어는 건물주에게 쫓겨났다. 가게를 지키기 위해 목소리 높였던 활동가들은 외쳤다. 이 가게들과 더불어 골목을 만들어온 문화와 앞으로 이어질 유산을 지키자고. 말로만 백년을 외치며, 이웃 나라 가서 백년가게 구경할 것이 아니라 지금 있는 가게와 골목을 지킬 수 있는 도시를 만들자고. 가게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면 어쩌나 전전긍긍했던 단골과 동네 사람들이 있었다. 오랜 세월 함께하며 터무니를 쌓아온 사람들이다. 노포는 안다. 이 가게를 함께 만든 사람들이 여전히 쫓겨난 그 자리에 남아있다는 것을.
터줏대감들은 그냥 그렇게 한숨쉬며 떠나지 않았다. 을지면옥은 인고의 시간을 지나 종로에 다시 자리를 잡았고, 을지OB베어는 마포를 거쳐 다시 본점을 원래 있던 골목에서 머지않은 곳에 차렸다. 이 도시가 어떻게 신령해질 수 있을까. 단지 이윤을 추구한다는 납작한 명분 하나로 모든 이들이 함께 쌓아온 터무니를 모조리 쓸어버리는 천박함을 어떻게 벗겨낼 수 있을까. 대안은 준비되어 있지 않지만, 그럼에도 터줏대감들은 돌아왔다. 할 수 있는 만큼은 해보겠다는 다짐이 새 가게들에 묻어 있다. 을지OB베어는 옛 붉은 벽돌을 연상시키는 인테리어와 그 처음부터 사용하던 테이블을 그대로 가져왔다. 철거되는 그 날에도 그것만큼은 지키기 위해 악을 쓰며 싸웠더랬다. 을지면옥은 메뉴 하나 변하지 않은 채로, 원래의 간판과 함께 돌아왔다. 그이들의 냉면을 닮아, 흰색 간판에 파란 붓글씨 쨍한 간판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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