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총리 다음달에 바뀐다…‘한일관계 개선’ 기시다 불출마 선언
기시다 총리 ‘불출마’ 선언
“정치불신 초래 책임진다”
‘포스트 기시다’ 경쟁 시동
이시바·고이즈미·다카이치 등
잠룡 후보들 합종연횡 예상
기시다 총리는 윤석열 대통령과 함께 ‘전후 최악’으로 평가받던 한일관계 개선을 끌어낸 주역이다. 차기 총리로 누가 당선되는지에 따라 한일관계에도 일정 부분 변화가 생길 가능성도 점쳐진다.
불출마 이유에 대해 그는 “국민에게 정치 불신을 초래한 사태에 대해 분명히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자민당이 바뀌는 것을 국민에게 보이는 가장 알기 쉬운 첫걸음은 제가 물러나는 것”이라고 답했다.
그는 이어 자민당과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옛 통일교)간 유착, 자민당 ‘비자금 스캔들’ 문제 등 정치 불신을 초래하는 사태가 잇따라 발생했다면서 “정치개혁으로 나아간다는 강한 의지를 갖고 무거운 결단을 했다”고 덧붙였다.
내각제인 일본에서는 다수당 대표인 자민당 총재가 총리로 선임되는 구조다. 총재 불출마 의사를 밝힌 기시다 총리는 내달 새 자민당 총재가 선출되면 총리직에서 퇴임하게 된다.
전임 스가 요시히데 총리의 뒤를 이어 2021년 10월 취임한 기시다 총리는 이날로 1046일째 총리로 재직하고 있다. 기시 노부스케 총리에 이어 전후 역대 8번째 장수 총리로 꼽힌다.
내각 출범할 때만 해도 60%대의 지지율을 기록했던 기시다 총리는 잇단 증세와 급격한 물가 인상 등이 겹치면서 지지율이 서서히 하락하기 시작했다. 특히 총격으로 사망한 아베 전 총리의 국장을 무리하게 추진하는 과정에서 여론이 급격히 돌아서면서 ‘지지하지 않는다’가 ‘지지한다’를 앞서는 ‘데드 크로스’를 기록했다.
기시다 지지율은 지난해 G7 의장국을 맡으며 ‘히로시마 서밋’을 주도하고 미일동맹 강화, 한일관계 개선 등에도 나서면서 소폭 반등했다. 하지만 지난해 하반기부터 이어진 자민당 ‘비자금 스캔들‘ 여파로 올해 내내 ‘정권 퇴진’ 수준인 20%대의 지지율에 시달려왔다.
경제 지표와 관련해 기시다 내각 출범 시기인 2021년 10월 2만8000이던 닛케이평균주가(닛케이지수)는 올해 34년 만에 역대 최고치를 갈아치우며 지난 7월 4만2224까지 오르기도 했다. 달러당 엔화값의 경우 출범 때 110엔이던 것이 약세를 이어가다 올해 7월에는 161엔까지 떨어지기도 했다. 두 차례의 환율 개입과 일본은행 금리인상 등에 힘입어 최근 140엔대 후반에서 거래되는 상황이다.
국내총생산(GDP)에서도 지난해 1% 성장하며 3년 연속 플러스 성장을 이어갔다. 하지만 엔화 약세로 인해 일본 국가 순위는 지난해 독일에 밀려 세계 4위로 내려갔다.
기시다 총리는 지난해 5월 한국을 찾아 일제 강제징용 노동자와 관련해 “나 자신은 당시 혹독한 환경에서 많은 분이 매우 고통스럽고 슬픈 일을 겪으셨다는 것에 마음이 아프다”며 “당시 고통을 겪은 분들에 대한 저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말한 것”이라고 언급했다.
그러면서 그는 1998년에 발표된 한일 공동선언(김대중-오부치 선언)을 포함해 역대 일본 내각의 역사 인식을 계승한다는 입장은 앞으로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사죄와 반성’ 표현을 직접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미흡하다는 평가도 나왔다.
지난달 말 실시된 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 여론조사에서 자민당 지지층을 대상으로 차기 총리감을 묻는 질문에 이시바 전 간사장이 20%로 1위를 기록했다. 이어 고이즈미 신지로 전 환경상(18%), 다카이치 경제안보담당상(13%), 고노 디지털상(8%), 가미카와 요코 외무상(5%), 모테기 도시미쓰 자민당 간사장(3%), 하야시 요시마사 관방상(2%) 등이 뒤를 이었다.
자민당 총재 선거는 오는 9월 20~29일 사이에 치러진다. 자민당 선거관리위원회가 오는 20일 회의를 열어 정확한 날짜를 확정지을 예정이다. 기시다 총리의 출마가 예상됐을 때는 미국서 열리는 유엔총회(9월 24일) 날짜를 피해 20일이 유력했는데, 불출마에 따라 일정이 재검토될 것으로 보인다.
3년 임기의 자민당 총재 선거는 통상 1·2차 투표를 거쳐 뽑는다. 1차 투표는 중의원·참의원을 합친 자민당 의원표 50%, 대의원 당원투표 50%로 이뤄진다. 여기서 과반 득표자가 없을 경우 상위 2명이 2차 투표를 진행한다. 2차 투표는 자민당 의원표와 47개 도도부현을 대표하는 지구당 1표씩의 합계로 진행된다.
1차 투표의 경우 당원 의견이 절반이나 반영되지만 2차 투표는 현직 의원의 입김이 절대적이다. 지난 2021년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도 1차 투표에서 과반 득표자가 없어서 기시다 총리와 고노 디지털상이 2차 투표를 진행했다. 여기서 기시다파·아소파·모테기파의 3개 파벌 연합을 일궈내 의원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은 기시다 총리가 승리했다.
아베 전 총리 집권 내내 그의 정책을 비판해 ‘아베 저격수’로 불리는 이시바 전 간사장이지만 2008~2020년까지 4번이나 총재 선거에 도전해 번번이 실패했다. 2020년의 경우 스가 총리가 당선됐을 당시 기시다 총리에 이어 꼴찌를 기록했고, 지난 2021년 총재 선거에서는 고노 디지털상으로 후보 단일화를 하며 출마하지 않았다. 이번에 출마할 경우 5번째 도전이 된다.
고이즈미 전 환경상은 훤칠한 외모에 40대라는 젊은 나이, 아버지인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의 후광 등으로 차기 총리감에 항상 순위에 오르고 있다.
일본 언론은 고이즈미 전 총리가 아들에게 “50세가 될 때까지 총재 선거에 나서지 않는 게 좋다”고 조언했다고 보도하고 있다. 이에 대해 고이즈미 전 환경상은 “아버지의 의견에 좌우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일본 정계에서는 ‘아직 준비되지 않은 총리감’이라는 평가가 많다.
고노 다로 디지털상은 지난 총재 선거에서 기시다 총리와 결선 투표를 치를 정도로 끈기 있는 모습을 보여줬다. 하지만 이시바 전 간사장과 함께 의원들 사이에서 평가가 좋지 않다는 것이 약점으로 꼽힌다. 특히 냉정한 그의 업무처리에 대한 의원들의 불만이 많은데, 이를 잘 모르는 젊은 의원들 사이에서는 인기가 있다는 평가다.
고노 디지털상은 자민당 내에서 파벌을 해체하지 않은 아소파 소속이다. 아소파를 이끄는 아소 다로 부총재는 50여명에 달하는 파벌 의원이 건재해 차기 총재 선거에서 캐스팅보트를 쥐고 있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다만 아소 부총재는 지난번 총재 선거에서도 파벌 소속 의원인 고노가 아닌 기시다 총리를 지지했던 상황이라 이번에 고노를 지지할 것인지는 미지수다.
지난번 총재 선거에도 출마했고 여론 조사에서도 ‘톱 5’에 항상 꼽히는 다카이치 사나에 경제안보담상은 ‘리틀 아베’로 불릴 정도로 강경 보수 정치인으로 분류된다. 장관 신분으로 태평양전쟁 A급 전범이 합사된 야스쿠니신사에 매번 참배를 이어가고 있다. 별도의 공부모임을 만들고 최근 일본의 경제안보와 관련된 책을 출간하는 등 차기 총리를 위한 활발한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출마가 유력시되는 인사로 분류되는 모테기 도시미쓰 자민당 간사장은 당내의 지지율이 약한 것이 부담으로 꼽힌다. 이를 의식한 듯 최근 스가 요시히데 전 총리와 식사하고, 당내 소장파들과의 접점을 넓혀가는 모습이 눈에 뜨이고 있다. 스가 전 총리는 당내 비주류 인사이지만 대중적 인지도가 높은 고이즈미 전 환경상, 고노 디지털상 등과 관계가 원만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함께 기시다 총리의 불출마 선언에 따라 그가 차기 총재 선임에 중요한 한 표를 들고 있다는 분석이 있다. 그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차기 총재로 누구를 미느냐’는 질문에 명확한 답을 피했지만, 과거 기시다파 소속으로 분류됐던 가미카와 요코 외무상, 하야시 요시마사 관방상 등을 지지할 것으로 예상하는 분위기도 있다.
이 가운데 하야시 관방상의 경우 군소후보로 분류될 정도로 국민적 지지율이 낮아, 여성 후보라는 카드를 앞세워 가미카와 외무상을 적극 지지할 가능성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아직 일본에서는 여성 총리는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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