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고자 해도 죽을 곳이 없다”…일제가 빼돌린 ‘의병 편지’ 고국에
“글을 받고 다 읽기도 전에 옷깃 가득 적시는 눈물을 멈출 수 없었습니다. 우리 의병부대의 군사장인 왕산(旺山:구한말 의병장 허위의 호) 선생이 체포됐습니다. 이(理)에는 변하지 않음이 없고 변함에는 지극하지 않음이 없다고 하나 우리나라 대한의 사정은 어찌 이토록 참혹한지요?”
1908년 5월24일, 대한제국을 일제 침탈에서 구하려고 일어선 전국 13도 의병 연합부대 ‘창의군’의 군수총독 노재훈은 동료인 대장 황순일 앞으로 비장한 편지를 썼다. 상관인 허위가 일제 군경에게 붙잡혔음을 먼저 알린 그는 뒤이어 이렇게 적었다.
“행동거지를 어찌 해야 할지요. 죽고자 해도 죽을 곳이 없습니다. 하물며 (허위) 선생께서 마치지 못한 큰 과업에 부응해 따라야 하는데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무릇 우리 전국 동지들이 어찌 뼈에 새겨 명심하며 광복의 희망을 일으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1909년 2월, 의병장 윤인순은 일제에 부역한 백성들에게 마음을 돌려 의병들 싸움에 협조할 것을 설득하고자 이런 글을 고시했다. “저 적은 나라의 피맺힌 원수임을 너희들은 아는 바인데 지금 하는 바는 도리어 부끄럽지 않겠는가. (…) 너희는 곧 마음을 고쳐먹고 반성하여 같이 어울리는 무리들과 상호간에 계의하여 머무는 지방에서 적을 참해 머리를 바치면 가히 공으로 속죄하고 중한 상을 줄 것이다. 살아서는 대한의 백성이 될 것이요, 죽어서는 대한의 귀신이 될 것이니, 너희들은 빨리 생각하여 서둘러 도모하라.”
19세기 말부터 1910년 경술국치 직전까지 막강한 무력을 지닌 일제에 맞서 항전하다 스러져간 현장의 절박한 사정을 전하는 구한말 의병들의 문서와 편지가 조국에 돌아왔다. 일제 군경 토벌대가 노획, 탈취한 것들로 한 헌병 간부가 훗날 일본에 빼돌렸던 희귀 사료들이다.
국가유산청(청장 최응천)과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이사장 김정희)은 광복절을 앞둔 14일 오전 경복궁 국립고궁박물관에서 환수유물 설명회를 열어 최익현, 허위, 이강년 등 각 지역 의병장들이 쓴 연락문과 편지들을 포함한 ‘한말 의병 관련 문서’ 13건과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된 직후 국제연맹에 제출한 ‘한일관계사료집’을 공개했다.
이날 공개된 ‘한말 의병 관련 문서’는 19세기 중반에서 1910년 국권침탈 직전까지 작성된 것들로 올해 7월 복권기금을 통해 일본에서 되찾은 유물이다. 1907년 경기도 양주에서 꾸려진 13도 지역 항일 의병 연합부대(13도 창의군)에서 활동한 주요 지휘관들이 작성한 연락문과 편지 등의 문서 9건, 의병장 출신으로 일제가 주는 음식을 거절하고 자결한 애국지사 최익현과 외세에 반대했던 위정척사파 학자 유중교의 서신 4건으로 이뤄져 있다.
13건의 문서는 비단과 두꺼운 종이를 발라서 꾸린 두 개의 두루마리 속에 정리돼 실렸다. 각 두루마리 첫머리(권두)에 수록된 문서에 대한 간략한 소개글(추기)이 덧붙여져 있다. 첫번째 두루마리(세로 35㎝×가로 406.5㎝) 권두에는 ‘한말 일본을 배척한 폭도장수의 격문’(韓末排日暴徒將領檄文 稀覯史料), 두번째 두루마리(세로 35㎝×가로 569.5㎝) 권두에는 ‘한말 일본을 배척한 두목의 편지’(韓末排日巨魁尺牘)이란 제목이 각각 붙어있어서 의병장과 항일지사들을 불온시하고 비하하려는 일제의 시각이 드러난다.
일제 헌병경찰이던 아쿠다카와 나가하루(芥川長治)가 1939년 8월 표장, 보존했다는 문구도 보여 일제 군경이 의병들을 토벌하면서 빼앗은 문서들을 수집해 1939년 두루마리본으로 꾸렸음을 알 수 있다. 추기를 통해 첫 두루마리를 “명치 43년(1910) 일한병합이 되기 전에 조선 각도에서 봉기하여 소요를 일으킨 폭도의 우두머리와 관계된 것으로 한말 사실 연구의 희귀한 문헌”으로 소개한다. 두번째 두루마리에서 “한말 걸출한 유생이자 배일(排日) 거두인 면암 최익현(1833~1906)의 진적(眞蹟)으로 희귀한 사료다. 대정 7년(1918) 4월 평북 의주헌병대원들이 국경을 넘어 중국 봉천성의 ‘의암선생문집’(의암은 의병장 유인석의 호) 편집 공간을 급습해 압수한 다수의 불온문서 중 일부”라고 설명한 대목도 눈에 띈다.
두루마리 내용 가운데는 13도 창의군 제2대 총대장 허위가 붙잡힌 당일인 음력 1908년 5월13일 작성한 문서와, 그의 체포를 통탄하며 각 의병진영의 단결을 촉구하는 허위의 형 허겸, 창의군 지휘관 연기우·노재훈의 글들이 포함돼 당대 의병들이 난관 속에서도 강력한 항전 의지를 갖고 일제와 싸웠다는 것을 여실히 짐작하게 한다. 의병에 대한 일제의 적대감과 탄압 행위를 현장 기록을 통해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희귀한 사료일 뿐아니라 입수 경위가 명확하게 기록된 점에서도 사료적 가치가 높다는 평가다.
‘한일관계사료집’은 1919년 출범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국제연합의 전신인 국제연맹에 민족의 독립을 요구하기 위해 편찬한 일종의 역사서로 4권짜리 완질본(각권 세로 32㎝×가로 19㎝)이다. 지난 5월 재미동포 개인 소장자가 아무 조건 없이 기증했다고 재단 쪽은 설명했다. 편찬 당시 모두 100질이 만들어졌으나 지금까지 완질로 전해져온 것은 국가등록문화유산인 독립기념관 소장본과 미국 컬럼비아대학 동아시아도서관 소장본뿐이어서 완질본의 추가 환수는 의미가 적지않다.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일원이었고, 사료집 집필진이기도 했던 독립지사 김병조(1877~1948)의 인장이 각 권 첫 머리마다 날인돼 그가 가까이 놓고 자주 이용했던 수택본(手澤本)으로 추정된다. 환수된 사료집을 살펴 본 박철상 한국문헌문화연구소 소장은 “김병조가 1920년에 3·1운동과 초창기 임시정부 실상을 기록한 역사서 ‘한국독립운동사략’을 펴내는 과정에서 이 사료집을 참고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짚었다.
이밖에 청과 재단 쪽은 지난 6월 일본에서 재일동포 고미술사업가 김강원씨로부터 기증받아 인수한 독립운동가 송진우(1890~1945)의 부친 송훈(1862~1926)의 한시 새김판 작품 ‘조현묘각운’(鳥峴墓閣韻)의 실물도 이날 처음 공개했다.
최응천 청장은 “단순히 국외에 있던 문화유산을 되찾아왔다는 차원을 넘어 정부기관과 민간소장자의 적극적인 관심과 선의가 맞물려 선조들이 조국을 지켜왔던 정신적 실체를 오롯이 회복하는 성과를 이뤘다는 점에서 더욱 뜻깊다”고 밝혔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도판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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