헝클어진 머리카락을 한올한올 빗어내리는 순간
어릴 때 눈을 뜨면 바가지에 물을 조금 담아서 엄마에게 가져갔습니다. 그러면 엄마는 빗에다 물을 조금 묻혀서 내 머리카락을 싹싹 빗어내린 뒤 왕방울로 야무지게 묶어주셨죠. 어떤 날은 엄마의 손이 부드러웠고, 어떤 날은 좀 거칠었어요. 그 손길의 느낌에 따라서 아침의 기분이 좌우되곤 했습니다. 머리 모양쯤은 혼자 만지고도 남을 만큼 커서도 가끔은 엄마한테 머리를 빗겨달라고 할 때가 있었어요. 어떤 특별한 마음가짐이 필요한 날에 그랬던 거 같아요. 엄마가 한껏 매만져준 나는 자존감도 올라갔던 거 같아요. 우크라이나 동부에 있는 아동 쉼터의 풍경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파편들의 집>에서 머리 빗겨주는 장면을 보다가 처음 생각해보게 됐어요. 누군가의 머리를 빗겨줄 때의 그 사람 마음에 대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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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동부는 오랜 전쟁의 여파로 무너진 가정이 많다고 합니다. 돌봐주는 손길 없이 방치된 아이들은 쉼터로 보내져요. 쉼터를 운영하는 사회복지사에 따르면 가정에서 아이들을 돌보지 않고 방치하는 건 가정폭력, 주거문제, 알콜중독이 주된 원인이래요. 전쟁으로 일자리가 사라지면서 어른들의 심신이 피폐해지고 그로 인해 파괴되는 가정이 늘고 있다는 거죠. 그런 환경에서 구조된 아이가 쉼터에 와서 머무는 사이 부모가 상황을 수습하고 아이를 찾으러 와서 데려가면 다행인데 그런 경우는 별로 없어 보입니다. 쉼터에서 지내는 아이들은 엄마가 걱정되는 것 말고는 별탈없이 잘 지내요. 잘 먹고 잘 자고 친구들도 사귀고 학교에도 꼬박꼬박 가지요.
그렇게 계속 지내도 좋겠다 싶지만 쉼터의 복지사들은 아이들을 내보낼 방법을 찾기 위해 안달복달해요. “친권이 말소되면 문제가 쉽게 풀린다”며 법원 결정이 빨리 나길 기다리는 복지사의 태도가 처음엔 이상하게 보였어요. 부모도 말 못할 사정이 있을 수 있고, 아이도 힘겹게 하루하루를 버티며 기다리고 있는데 서둘러 부모자식 간의 법적 관계를 끊어내서 좋을 게 뭐가 있을까 싶어서요. 어느 부모가 아이를 포기하고 싶겠어요. 어느 아이가 자기 집을 두고 보육원이나 다른 집의 아이로 입양 가고 싶겠냐고요. 하지만 현실은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더라고요. 엄마와 연락이 끊어지고, 쉼터에 머물던 친구들이 하나둘 떠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아이들 마음에도 체념이라는 것이 찾아와요. 돌아갈 집이 없고 엄마가 찾지 않는데 쉼터에서 계속 기다릴 수만은 없는 현실을 차차 받아들이게 되지요. 아이가 상황을 이해하고 체념할 준비가 되면 기다렸다는 듯이 복지사가 아이를 불러요. “사샤. 내가 오늘 널 부른 건 언제까지고 여기 살 순 없어서야. 이 쉼터는 임시 거처일 뿐이잖아. 위탁가족이랑 함께 살고 싶은 생각은 없니?”
여기서 머리카락을 빗겨주는 장면이 나와요. 아이는 얌전하게 의자에 앉아 있고 복지사가 천천히 조심조심 머리를 빗겨주지요. 한올 한올 섬세하게 정돈된 머리카락처럼 마음이 차분해진 상태에서 사샤는 새엄마가 될지도 모르는 낯선 어른을 맞이해요. “사샤, 정말 귀엽구나.” 복지사는 사샤에게 하루 동안 잘 생각해보고 마음이 정해지면 답을 달라고 해요. “네가 결정하는 거야.”
반복된 도벽으로 물의를 일으키고 팔뚝에 못된 문신을 새겨넣는 최고 말썽꾸러기 콜랴에게도 그날이 왔어요. 평소와는 다르게 단정한 머리를 하고 동생들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더니 여동생 크리스티나의 머리를 정성껏 빗겨주었죠. 고무줄로 묶어주고 머리띠까지 씌워줬어요. 마치 동생들과 헤어져야 하는 순간이 임박했다는 걸, 알고 있는 것처럼요. 아니나 다를까 복지사가 다가와요. “콜랴. 너도 상황은 알지? 엄마한테 연락이 전혀 안 와. 국영보육원은 부모가 언제든 자식을 데려갈 수 있어. 좋은 곳이니 날 믿으렴. 친권은 그대로 뒀으니 아직 기회는 있어.”
동생들과 헤어질 수 없다며 끝까지 저항하지만 콜랴도 이미 알고 있어요. “무슨 소용이에요? 어차피 엄마는 안 올 텐데.” 자기도 어린 아이에 불과한데 엄마를 대신해 동생들을 지켜야 한다는 중압감에 얼마나 힘겨웠을까요. 그런 콜랴를 보내고 나서 복지사도 훌쩍훌쩍 콧물 들이 마시는 소리를 내더군요. 수십 년째 쉼터를 운영하고 있는 베테랑이지만 가족을 잃은 아이를 더 껴안아주지 못하고 떠나보내는 마음은 매번 무겁고 아플 거 같아요.
영화의 중간에 우크라이나의 강물 위를 날아가는 새떼들의 모습을 배경으로 복지사가 관객에게 이야기 하나를 들려줘요. 쉼터를 오래 운영하다 발견하게 된 패턴에 대한 얘기인데요. 위기에 처한 가정의 아동이 쉼터에 오면 그다음은 대개 비슷하게 흘러간대요. 부모들은 결국 친권을 잃어요. 세월이 흘러 쉼터에 왔던 소녀가 어른이 되어 다시 쉼터로 온대요. 자기 아이를 만나러요. 그렇게 복지사와 재회한 소녀가 “저를 기억하세요?” 하고 물을 때, 복지사는 어떻게 대답을 했을까요. 어린 시절에 봤던 부모의 삶을 고스란히 반복하는 아이들을 계속 맞이하고 떠나보내면서,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복지사들은 그 자리를 지키고 있어요. 그 숱한 패턴의 반복을 경험하고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아지는 삶이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아야 지속할 수 있는 것이 그들의 일이겠지요.
가끔 지금 내 나이 때 엄마의 모습을 떠올려보곤 해요. 한 사람의 인생은, 그 사람만의 고유한 시간인 것인 것 같지만 앞선 삶이 다음 삶을 낳고 연결하고 반복하는 것 같아요. 이어지는 이야기, 변주되는 노래, 재생되는 경험의 연속이 곧 삶인 거 같아요.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엄마가 내 머리를 빗겨주던 순간과 내가 동생의 머리를 빗겨주던 순간을 연결해서 더듬어봤어요. 랄랄라 즐거웠고 깔깔 웃었고 장난도 쳤지만 어떤 날은 귀찮음과 짜증이 묻어 있을 때도 있었던 거 같아요.
영화에서처럼 어딘가로 떠나 보내기 위해, 작별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머리를 빗겨주는, 그런 순간의 기억이 없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운이 좋았다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데 문득 소름이 돋았어요. 아이가 가족에게서 격리되고 끝내 법적으로나 물리적으로 아주 헤어지는 일이 빈번해진 현실을 담아낸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면서, 우리 얘기가 아니어서 다행이라 생각하는 어른이 되어 있는 내가 부끄러워서요. 아이와 함께할 안전한 주거와 생활과 교육에 대한 확신이 없었기에 엄마되기를 포기해버린 내 결정에 대해서도 돌아보게 되었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남녀의 애정을 기반으로 한 가정이라는 단위는 그 사이에서 태어날 아이의 성장을 전적으로 맡기기에는 너무도 취약한 것 같아요. ‘그건 당신 생각일 뿐’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이런 내 생각도 앞선 여인들의 삶이 반복해 보여주고 들려주는 이야기들이 쌓여서 형성된 것이죠. 우리가 보아온 삶과 경험한 삶이 다음 세대로 하여금 지속하게 할만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나만 하고 있는 아니었다는 건 분명해 보여요.
다시 영화 속 사회복지사가 해준 말을 떠올려봐요. 그래도, 희망은 있다는 말. 희망이란 가장 나중에 죽는 것이라던 말. 엄마가 찾아오지 않는 절망 속에서도 친구들과 인사 나누고 말없이 짐을 꾸리던 쉼터의 아이들처럼, 우리도 다음 세상을 향한 길을 묵묵히 준비해나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동그란의 마음극장은?
어떤 영화는 좀처럼 끝나지 않습니다. 내 이야기가 왜 저기 들어있나 싶은, 나보다 내 마음을 더 잘 드러낸 것 같은, 친구에게 꼭 보라고 얘기해주고 싶은 그런 장면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영화칼럼니스트 ‘동그란’이 격주로 마음 속에서 재편집되는 대사, 기억의 영사기에서 반복되는 장면을 이야기합니다.
영화 칼럼니스트 이하영 ha028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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