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일리 매닝의 바다···알래스카 바다와 서해 바다가 만났다 [아트씽]
카일리 매닝 국내 첫 개인전
한국의 지역성 고려한 신작
음악·무용 융합한 독창적 예술
시원한 파도를 연상케하는 작품들이 무더위에 지친 관람객들을 반갑게 맞이한다. 각 작품마다 역동적인 붓의 흔적에 담긴 은은한 색채들은 구상과 추상 이미지 사이의 경계를 흐린다. 그리고, 그 애매모호한 경계는 자욱한 안개가 낀 바다를 연상시키며 묘한 긴장감을 조성한다. 마침, 우리나라 서해 바다를 지칭하는 ‘황해 (Yellow Sea)’가 이번 전시 제목이기도 하다.
떠오르는 미국의 스타 작가 카일리 매닝 (Kylie Manning)이 한국에서 열리는 그녀의 첫 전시를 위해서 방한했다. 서울 강서구 마곡동 스페이스 K에 7m가 넘는 대형 설치 작업을 포함한 회화 작품들 20여 점이 전시중이다. 뉴욕 브루클린에서 작업하는 매닝은 근래 미국, 유럽, 아시아를 포함한 전 세계에서 굵직한 프로젝트를 선보이며 주목받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번 전시는 음악, 무용 등 다양한 예술 장르와 협업하며 새로운 시각예술을 지향하는 매닝의 작업 연대기를 종합적으로 돌아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구상과 추상이 혼재된 매닝의 시그니처 작품뿐만 아니라, 작년 5월 뉴욕 시티 발레단과 협업했던 ‘내 안의 너로부터(From You Within Me)’ 무대 프로젝트를 위한 추상 스터디 작품들 또한 국내에 들어왔다.
전시 제목이 ‘황해 (Yellow Sea)’일 정도로, 카일리 매닝과 바다는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알래스카 태생인 그녀는 미술교사와 자연으로의 귀의를 주장하는 히피였던 부모님의 영향으로 멕시코와 알래스카를 오가며 자랐다. 어렸을 적부터 자연과 예술에 노출되었던 매닝은 자신 주변에 있는 바다와 가까워질 수밖에 없었다. 낚시, 서핑, 배와 같이 바다와 관련된 소재들이 그녀의 그림에 자주 등장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실제로 학업과 작업을 병행하기 위해서 매닝은 500t 급 선박의 항해사 자격증을 따며, 연어잡이 배에서 일을 하기도 했다. 이에 그녀가 봐왔던 다양한 모습의 바다 풍경들은 현재 화폭에 은연중에 담겨 있다.
그런 알래스카의 바다가 이번에는 우리나라의 서해안 ‘황해’ 와 만났다. 바다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카일리 매닝이지만, 이번 전시에서 ‘황해'는 그녀에게 더욱 특별하다. 매닝은 자신의 전시가 이뤄지는 공간, 단순히 물리적인 공간을 넘어서 그 공간을 둘러싸고 있는 지리적 환경과 역사와 같은 내러티브를 깊이 고민하는 작가다. 이에 매닝은 서해의 큰 조수 간만의 차로 인해 바다의 색 경계가 유동적으로 변하는 것이 자신의 화폭과 비슷하다는 점을 발견했다. 빠르게 밀려오고 빠져나가는 서해 바다의 밀물과 썰물처럼 화면 안에 그녀의 붓질 또한 빠르고 느리게 화면 내에 긴장감을 자아낸다. 각기 다른 속도의 붓질은 구상과 추상 이미지 사이의 경계를 흐리게 하기도 하고, 명확하게 만들기도 한다. 이렇듯 구상과 추상 사이의 형용할 수 없는 ‘애매모호한 이미지’는 자연스럽게 카일리 매닝이라는 사람 자체를 드러내는 듯하다. 과거 그녀가 배를 타면서 봤었던 시시각각 변하는 바다의 수평선과 서핑 애호가인 그녀가 경험하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파도들은 매닝의 삶 자체이자 작업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작가는 이번 전시에 처음으로 선보인 세폭화인 ‘자연의 자연, 2024(The Nature of Nature, 2024)’를 가장 좋아하는 작품으로 꼽았다. 그림 내에 주로 사용된 짙은 황색과 녹색은 향토적인 향수를 자아내기도 한다. 가로 6m가 넘는 이 거대한 그림에는 인물들이 왼쪽에서부터 오른쪽까지 물 흐르듯이 배치돼 있다. 독특한 점은 왼쪽에는 확실한 윤곽과 형체를 알아볼 수 있는 구상적인 인물들이 위치해 있다면, 오른쪽으로 갈수록 인물들의 형체는 알아볼 수 없다. 그림 내에서 상반된 이미지들 사이의 유기적인 흐름은 인간은 자연과 같은 주변 환경에 의해 통합되고 완성된다는 작가의 작업 철학을 보다 잘 드러낸다.
이 세폭화 뿐만 아니라 세로 길이가 7m나 되는 5개의 염색된 실크가 늘어져 있는 대형 설치 작품들 또한 이번 전시에 처음 공개됐다. 무대 디자인을 연상시키는 실크 설치 작업 사이로는 사람들이 자유롭게 지나다닐 수 있다. 사람들이 작품 앞과 뒤 사이로 통과할 수 있으며, 그때마다 펄럭이는 실크와 움직이는 사람들은 마치 무용 공연을 보는 듯한 황홀한 장면을 연출한다. 매체 성격은 다르지만 작년 5월 매닝이 뉴욕시티발레단과 무대디자인 및 의상 협업을 하였던 프로젝트의 연장성처럼 보인다. 다만 주인공이 무용수가 아닌 일반 관람객으로까지 확대되었다는 점은 매닝이 전시장에 단순히 작품을 설치했다기 보다 그 공간에서 자신의 작품과 사람의 유기적인 관계를 얼마나 고려했는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처럼 전시에서는 관람객들이 무용수가 된 듯 카일리 매닝이 펼쳐놓은 팔레트 위에 춤을 추듯 항연 하는 모습을 감상할 수 있다.
알래스카에서 시작된 매닝의 주관적 경험은 그 지역을 뛰어넘어 또 다른 공간에서 보편적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근래 몇 년 동안 행해진 카일리 매닝의 진지한 작업 세계를 종합적으로 경험할 수 있다. 매닝의 작업에서 구상과 추상 이미지의 경계, 그리고 다른 예술 장르 내에서의 경계를 규정할 수 없다. 이처럼 매닝을 단순히 그림을 그리는 페인터라고 한정 짓고 싶지 않다. 앞으로 매닝의 여정이 기대가 되며, 그녀의 시점에서 재해석된 다양한 지역 및 공간들이 어떻게 펼쳐질지 궁금해진다.
▶▶필자 엄태근은 한국예술종합학교 조형예술과를 졸업하고 뉴욕 크리스티 에듀케이션에서 아트비즈니스 석사를 마친 후 경매회사 크리스티 뉴욕에서 근무했다. 현지 갤러리에서 미술 현장을 경험하며 뉴욕이 터전이 되었기에 여전히 그곳 미술계에서 일하며, 리만머핀 서울 갤러리의 '원더랜드' 등 전시기획도 하고 있다.
아트씽 기자 artseeing@sedaily.comCopyright © 서울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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