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집중] 김형석 "조선은 日 법령 지배하에 있었지만, 위안부-강제동원은 부당"

MBC라디오 2024. 8. 14.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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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석 독립기념관장>
-광복회, 이승만 지지자를 뉴라이트-친일파로 매도.. 국론 분열
-독립기념관 공모 과정서 용산-보훈부와 일체 연락 없었다
-모든 역사학자가 반대? 지지한다고 연락 주신 학자들도 많아
-독립정신=건국정신. 건국정신=건군정신? 공직자여서 답변 곤란
-이종찬, 면접 때 난데없이 인신공격.. 일본 신민? 조작이자 날조
-조선, 日법령 지배하에 있었지만... 日, 부당한 방법으로 강압통치
-日제도에 의해 창씨개명-일본식 연호 사용... 우리 민족의 비극
-건국은 1919~1948년까지 연속 과정. 중요한 시점? 이분법적 말씀
-건국 완성은 1948년 8월 15일. 주권만 없던 미국과는 달라

■ 방송 : MBC 라디오 표준FM 95.9MHz <김종배의 시선집중>(07:05~08:30)
■ 진행 : 김종배 시사평론가
■ 대담 : 김형석 독립기념관장

☏ 진행자 > 오늘 3부는 예고해드린 대로 김형석 독립기념관장과 이야기를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전화 연결돼 있는데요. 나와 계시죠?

☏ 김형석 > 네, 김형석입니다.

☏ 진행자 > 지금 관장님이 요 며칠 논란의 중심에 서 계신데요. 심경이 어떠십니까?

☏ 김형석 > 마음이 아픕니다만, 우리 국민들이 하나로 나아가기 위한 진통이라고 생각하고 저는 제 역할을 충실히 감당하고 있습니다.

☏ 진행자 > 국민이 하나로 나아간다는 건 어떤 뜻인가요?

☏ 김형석 > 지금 대한민국이 극심한 진영 대결을 벌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진영 대결을 서로 해결하지 않고서는 우리나라의 장래가 없거든요. 이번에 제가 독립기념관장에 응모하게 된 이유도 독립기념관에서 독립 정신을 널리 알려 국민통합을 이룰 분을 찾는다라고 공고가 나왔습니다. 그래서 그 공고를 보고서 이런 사명이라면 내가 늦은 나이에 한 번 공직에 도전해서 평생 제가 가지고 있는 소신을 실천해 볼 기회가 되어졌다. 그래서 응모하게 되어진 겁니다.

☏ 진행자 > 지금 관장님은 진영 대결의 희생양이다, 이런 생각을 하고 계시는 겁니까?

☏ 김형석 > 희생양이라기보다는 진영 대결 중앙에 제가 서서 받지 않아도 될 불필요한 오해들도 많이 받고 있고요. 사실도 많이 왜곡되고 있고 그렇습니다.

☏ 진행자 > 최초로 문제 제기한 곳이 광복회인데 광복회는 어느 진영에 속해 있는 단체인가요?

☏ 김형석 > 그건 말할 필요가 없이 지금 광복회가 주장하는 특히 광복회가 오늘 아침에 신문에 보니까 뉴라이트를 가르는 9가지 기준이라고 하는 것을 발표했는데 그건 아주 자의적이고 편파적인 그런 해석이지요. 그 기준에 따른다면 대한민국에는 정신적인 지도자가 두 분이 있거든요. 한 분은 이승만 대통령이고 한 분은 김구 선생입니다. 그런데 광복회는 이승만 대통령을 지지하는 심정적으로 그를 따르는 모든 국민은 전부 다 뉴라이트라고 매도를 하고, 그건 다 친일파라고 그렇게 공식을 세워서 지금 국론을 분열시키고 있는 것 아닙니까. 저는 평생 제가 공부하면서 또 이번에 문제가 되어진 끝나야 할 역사 전쟁, 제가 이전에 쓴 책입니다만 그 책에서도 김구 선생을 따르는 분들과 이승만 대통령을 따르는 분들 사이에 화해가 없이는 이 두 분을 우리가 함께 서로 존중해주지 않는 한 대한민국의 미래가 없다고 염려하고 있는 학자거든요.

☏ 진행자 > 알겠습니다. 이 문제 갖고 길게 끌 건 아니지만 이종찬 광복회장이 지난주에 저희하고 인터뷰할 때 이승만 전 대통령에 대해서 공8, 과2 이렇게 평가를 했거든요.

☏ 김형석 >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 진행자 > 지금 관장님의 광복회에 대한 평가하고는 다른 얘기 한 거 아니겠습니까?

☏ 김형석 > 아니죠. 아니 이승만 대통령은 이승만 대통령대로 그분이 독립운동과 건국에 끼친 공적과 우리가 우리 역사에서 평가해야 될 그런 공과, 그 다음에 그분이 나중에 대통령으로서 장기 독재와 4.19 당시에 있었던 여러 가지 국내 정황들에 대한 비난과 그런 두 가지가 존재하는 것이고요.

☏ 진행자 > 아니요. 관장님 제가 여쭤본 건 이승만 전 대통령의 평가를 듣고 싶어서 여쭤본 게 아니라, 이승만 대통령을 평가하는 광복회의 시선에 대해서 조금 전에 관장님이 말씀을 하셨길래 광복회는 그렇게 보지 않더라라고 제가 질문을 드린 거니까.

☏ 김형석 > 아니 그렇게 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지금 광복회 홈페이지에 올라 있는 뉴라이트를 판별하는 9가지 기준 거기에 첫 번째 두 번째가 그러지 않습니까.

☏ 진행자 > 알겠습니다. 기자회견에서 주변인들이 나를 적임자라고 권유했다. 그래서 독립기념관장에 지원했다 이 취지로 말씀을 주셨어요.

☏ 김형석 > 그렇습니다.

☏ 진행자 > 주변인이 누군지 구체적으로 밝혀주실 수 있을까요?

☏ 김형석 > 실명을 거론할 필요는 없고요. 제가 지혜의 숲 100인 포럼이라고 제가 7일까지 이사장으로 일하고 있던 대한민국역사와미래에 소속되어진 포럼인데요. 거기에 우리 사회 각계의 활동하시는 원로와 전문가들이 거기에 참여를 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거기에 계신 분들 가운데 저보고 이런 독립기념관에 이번에 관장 공모가 있는데 한번 응모해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권하시는 분들도 있고 또 제가 이제까지 맡은 재단을 내려놓고 독립기념관을 가는데 대한 의견들도 물어보고 그런 과정에서 다 하나같이 당신이 정말 마지막 감당해야 될 사명인 것 같다라고 해서 제가 기쁜 마음으로 참여한 겁니다.

☏ 진행자 > 지혜의 숲에서 함께하시는 분들이 권유했다라는 취지의 말씀이신데, 그분들 중에 혹시 용산이나 국가보훈부하고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연결돼 있는 분이 계십니까, 안 계십니까?

☏ 김형석 > 없습니다.
☏ 진행자 > 그건 없습니까?

☏ 김형석 > 네.

☏ 진행자 > 그러면 관장님이 독립기념관장 공모에 응모하는 과정에서 용산이나 보훈부하고 일체의 어떤 연락도 없었다.

☏ 김형석 > 그렇죠. 연락할 방법도 없고요. 그분들이 또 저를 찾은 적도 없고 그렇습니다.

☏ 진행자 > 그럼 혹시 이 논란이 불거진 다음에는 연락이 온 적이 있습니까?

☏ 김형석 > 제가 용산에서는 한 번도 그런 제가 연락을 받거나 그런 적이 없었고요. 보훈부는 제가 임명장을 받는 과정이나 그 다음에 또 기자회견을 보훈부 지청에서 했기 때문에 그럴 때 관계자들과 서로 안부도 묻고 또 궁금한 얘기도 나누고 한 적은 있지만 인사와 관련해서는 그런 적이 없습니다.

☏ 진행자 > 조금 전에 이종찬 광복회장이 다른 방송 인터뷰를 했는데요. 거기서 어떤 주장을 했냐면 관장님이 권력의 비호를 받는 것 같다 이런 발언을 했다고 합니다. 어떤 말씀 주시겠습니까?

☏ 김형석 > 저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고, 그런 말씀들에 대해서 나중에 책임 있게 본인이 증명을 해야 되겠죠.

☏ 진행자 > 그래요. 근데 또 이종찬 회장이 어떤 말을 했냐면 모든 학자들이 다 반대하는데 어떻게 관장직을 수행하겠느냐, 이제 일을 하고 싶어도 못할 거다, 이런 또 평가도 내렸다고 하는데 어떤 말씀 주시겠습니까?

☏ 김형석 > 그거는 그분이, 그분이 상대한 모든 학자들이고 저에게 강력한 지지와 꼭 당신이 이 사명을 감당해야 된다고 연락을 주신 학자 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 진행자 > 알겠습니다. 독립기념관장으로서 꼭 하고 싶은 일이 뭐예요?

☏ 김형석 > 지금 독립기념관이 운영상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그리고 독립기념관의 이용객도 설립 초기에 비하면 많이 줄었습니다. 그리고 또 40년이나 되어져서 시설도 노후화되어져 있습니다. 이 모든 상황을 타개해서 새로운 비전을 제시해야 될 것이 저에게 주어진 과제고요. 3년 있으면 독립기념관이 개관되어진 지 40주년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래서 40주년에는 국민들에게 다시 다가가는 독립기념관을 만들기 위해서 제가 혼신을 다할 생각입니다.

☏ 진행자 > 독립기념관은 어렵게 설명할 것 없이 독립 정신을 계승하고 고취하는 게 주된 업무라고 봐야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 김형석 > 그렇습니다.

☏ 진행자 > 그러면 한번 질문을 이렇게 드려볼게요. 독립정신과 건국정신은 같을까요. 다를까요.

☏ 김형석 > 건국정신과 독립정신요.

☏ 진행자 > 같습니까? 다른 겁니까?

☏ 김형석 > 같습니다.

☏ 진행자 > 같습니까?

☏ 김형석 > 예. 1948년 8월 15일 날 우리 정부가 처음 수립될 때에 그때 제헌국회에서 4대 국경일을 지정을 했습니다. 그때는 광복절이 아니고 명칭이 독립기념일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 진행자 > 그러면 관장님 같다고 지금 말씀하셨으니까 불현듯 떠오르는 게 있어서 질문 드리는 건데요. 독립정신과 건국정신이 같다면 건국정신과 건군정신은 같은 반열에 놓고 봐야 되는 거죠?

☏ 김형석 > 잠깐만요. 뭐라고요?

☏ 진행자 > 제가 질문을 이렇게 드려볼게요. 얼마 전에 한국사회에서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 문제가 엄청난 논란이 된 적 있지 않습니까? 육사에 있던 걸 이전해야 된다고 그래서. 근데 이전의 논리가 뭐였냐면 홍범도 장군이 독립운동에 헌신한 건 알지만 건군 이념과 맞지 않다라는 게 이유였습니다. 기억하시죠?

☏ 김형석 > 예.

☏ 진행자 > 그러면 그 논리는 관장님의 논리에 따르면 배척돼야 되는 논리가 맞는 거죠.

☏ 김형석 > 예, 잠깐만요. 저도 제 얘기를 할 수 있는 시간을 주셔야

☏ 진행자 > 예, 말씀하세요.

☏ 김형석 > 제가 홍범도 장군의 흉상 이전 문제가 나왔을 때에 저의 입장을 피력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홍범도 장군은 우리 무장 항일운동사에서 가장 상징적인 인물이시고 우리 독립운동사에 큰 업적을 남긴 영웅이시죠. 그런 분을 육사라고 하는 폐쇄된 공간, 아무나 출입할 수도 없고 소수의 육사인들만 볼 수 있는 그런 공간에 왜 가두어서 우리가 많은 열린 공간에서 우리 국민 누구나 다 홍범도 장군을 만나고 또 그분의 관한 업적을 갖다가 교육하고 그럴 수 있는 독립기념관 같은 곳에 가면 더 좋지 않겠는가. 저는 그런 취지에서 홍범도 장군의 흉상에 대해서 할 수 있으면 폐쇄된 육사보다는 온 국민이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열린 공간인 독립기념관이 더 상징성이 있고 좋지 않겠나라고 얘기를 했던 것이 저의 견해였고요. 제가 그 질문에 대해서는 이 대답으로 갈음하겠습니다.

☏ 진행자 > 그런데 갈음이 안 되는 부분이 있을 것 같아서 다시 한 번만 질문 드려볼게요. 왜냐하면 제가 여쭤본 건 지금 관장님의 부분이 아니라 관장님의 견해에 기초해서 그때 나왔던 논리를 여쭤보는 건데 건군이념과 다르기 때문에 흉상을 이전해야 된다는 논리라면 독립정신과 건군이념은 별개라는 얘기가 되는 거고, 그러면 조금 전에 관장님이 말씀하셨던 독립정신과 건국정신은 같은 거라고 하는 것과 결이 달라서 확인 차 질문 드린 거거든요.

☏ 김형석 > 잠깐만요. 제가 역사학자 개인이었을 때는 개인의 입장이었을 때는 얼마든지 제가 소신껏 제 얘기를 할 수가 있지만, 저는 지금 독립기념관 관장이라고 하는 공직자 입장입니다. 그런데 그 건군 정신에 관한 것은 저의 업무 영역이 아니거든요.

☏ 진행자 > 그래요.

☏ 김형석 > 그래서 건국이나 광복이나 독립에 대해서 얘기하신다면 제가 얼마든지 토론을 하지만은 건군에 관련된 것은 제가 공직자 입장에서 지금 이 인터뷰에서 대답하기는 곤란하다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 진행자 > 알겠습니다. 일본 국적 발언을 다시 한 번 설명 해 주시겠습니까?

☏ 김형석 > 예, 이종찬 광복회장은 독립기념관의 당연직 이사거든요. 그래서 독립기념관장 임원추천위원회에 위원의 한 사람으로 참여를 했습니다. 그날 그분이 난데없이 저보고 인신공격성의 발언을 막 하기 시작했어요. 당신은 김구와 이승만을 편가르기 위해서 좌파와 우파로 나누고 그렇게 분열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 그러면서 그 다음에 어떻게 독립기념관장이 되려고 했느냐라는 말씀을 하시고, 이어서 저보고 하시는 말씀이 당신은 일제시대 우리 국민의 국적이 어디 라고 생각하느냐라고 국적이 어디라고 생각하느냐라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거기에 대해 이렇게, 첫째는 제가 어떤 책에서도 좌파와 우파를 편가르기하고 진영대결을 조장한 그런 사실이 없거든요. 그래서 이분이 왜 이런 공격을 하실까 하고 말씀을 생각하면서 이렇게 대답을 했어요. 일제시대에 우리 국민의 국적은 일본이었죠. 주권을 빼앗겼기 때문에 일본인데 그래서 우리가 그걸 되찾기 위해서 온 국민이 독립운동을 한 것 아닙니까. 내가 그렇게 대답을 했어요. 나중에 일본 신민이니 뭐니 이상한 얘기를 하는데 그건 전혀 사실이 아니고 그건 조작이고 날조입니다.

☏ 진행자 > 그러면 그 얘기부터 한번 이어가서 질문 드려볼게요. 국적이 일본이었다라는 그런 말씀에 따르면 표현을 바꿔서 당시 일제의 법령의 지배하에 있었다 라고 해석해도 되는 거죠?

☏ 김형석 > 국내에 있는 우리 조선인들은 어쩔 수 없이 일본의 법령의 지배하에 있었고, 그래서 그걸 갖다가 우리가 항거하는 그런 독립운동을 했던 거 아닙니까?

☏ 진행자 > 여기서 독립운동을 말씀 여쭤보고자 하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 평범한 조선인들, 일제의 법령의 지배하에 있었던 조선인들이

☏ 김형석 > 그 법령 지배하에 있었던 것은 틀림이 없죠.

☏ 진행자 > 그러니까요. 질문마저 드릴게요. 법령의 지배하에 있어서 어떤 일을 겪었냐면 징용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면 일제가 예를 들어서 국가총동원법이라는 것도 만들고 거기서 국민징용령이나 노무조정령 이런 것들을 만들어서 강제로 끌고 가서 징집도 하고 노동도 시키고 위안부로 동원도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이건 일제의 법령에 의한 통치였다, 이렇게 해석해야 되는 걸까요?

☏ 김형석 > 그렇게, 그렇게 비화를 하고 그 다음에 왜곡을 해서는 그건 곤란한 얘기고요.

☏ 진행자 > 어째서 이게 왜곡입니까?

☏ 김형석 > 아니 일제가 부당한 방법으로 강압 통치를 했기 때문에 거기에 저항했던 것이 우리의 독립운동의 역사고, 그런데 지금 우리가 원치 않았던 것을 강제로 나라가 빼앗겼기 때문에 그 사람들이 우리 국민을 강제로 끌고 간 거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가 거기에 반대를 한 거 아닙니까.

☏ 진행자 > 그러면 지금 말씀드린 국적이 일본이었다라는 말씀도 하시지 않는 게 오히려 더 나았던 거 아니겠습니까?

☏ 김형석 > 아니 당신이 나한테 바로 그분이 그렇게 물어보니까 내가 학자적인 견해로서 보십시오. 이제 똑같은 얘기를 자꾸 어떻게 보면 해야 되는데 내가 그렇게 기자회견에서 답을 했죠. 지금 올림픽을 하고 있다. 왜 손기정 선수가 일장기를 달고 뛰었고 일본 국적으로 출전을 해야만 했겠는가 그게 바로 나라를 빼앗긴 슬픔이다. 그래서 우리가 그 나라를 빼앗긴 사실 자체를 부정하고 한일합방이 없었다라고 한다고 해서 어느 누가 인정해 주느냐. 그래서 우리가 아픔을 기억하면서 우리가 다시는 나라를 빼앗기지 아니하고 우리가 빨리 나라를 되찾고 그게 우리 조상들의 생각이었고 그게 독립운동사 연구하는 사람 입장에서 바른 자세지 역사적으로 있었던 우리의 치욕스러운 그 자체를 그걸 갖다 없었다고 부정한다고 해서 없어집니까. 그건 분명한 본질과 의미를 알고 그렇게 하셔야지 우리 잘 아시는 앵커께서 제가 평상시에 참 이 프로 좋아하고 자주 듣는데 지금 자꾸 나한테 어떻게 보면 궤변을 강요하는 거 아닙니까. 그거는.

☏ 진행자 > 제가 궤변을 강요하는 건지는 우리 애청자 여러분들의 판단에 맡기도록 하고요.

☏ 김형석 > 애청자들이 판단하시겠죠.

☏ 진행자 > 추가 질문을 하나를 더 드릴게요. 이종찬 회장이 그때 면접 과정에서 이 질문을 드린 이유가 이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최근에 지금 논란이 되고 있는 게 사도광산 문제 알고 계시잖아요. 관장님.

☏ 김형석 > 네, 알고 있습니다.

☏ 진행자 > 여기서 전시시설의 강제성 부분이 표기가 안 됐다라고 하는데 논란이 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전시 시설을 보면 안내판에 어떻게 되어 있냐면 1944년부터 조선반도에 징용이 도입됐다라고 기술되어 있고, 징용은 법령에 근거한 것이었다라고 함으로써 징용의 합법성을 강조를 했다라는 겁니다. 그러면 제가 아까 일제의 법령의 지배하에 있었다라고 하는 이야기로 연결이 되는 것이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질문을 드린 이유가 여기에 있거든요. 이 점은 어떻게 보십니까?

☏ 김형석 > 아니 보십시오. 내가 일본의 사도광산에 대한 그런 사실에 비판적인 입장이란 걸 분명히 말씀드리고요. 일제시대 우리 백성들이 왜 일본말로 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그 다음에 강제적으로 참여가 돼가지고 우리는 원치 않았지만은 공권력에 의해서 그렇게 우리가 수탈을 당할 수밖에 없었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걸 갖다가 일본의 그런 부당성을 내가 지적을 하고 있는 사람인데 당신은 그럼 일본의 그런 부당한 데에 대해서 동조를 하고 옹호를 하느냐는 식으로 지금 마치 물어보는 것처럼 들린단 말이에요.

☏ 진행자 > 아니, 국적이 일본이라는 걸 인정을 하기 때문에 질문 드리는 겁니다.

☏ 김형석 > 그때 당시에는 우리는 원치 않았지만 옛날 분들 제적을 떼 보십시오. 옛날 분들 제적을. 그분들은 원치 않았지만은 그래서 일본 사람들이 강제적으로 뭡니까. 창씨개명도 하고 그 다음에 일본의 제도에 의해서 옛날에 우리가 다 일본식 연호를 억지로 모든 곳에 사용했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심정적으로 거부하고 그렇게 했지만 모든 제도상에는 그것이 엄연히 일제 36년간 우리 민족의 아픔이고 비극인데 그걸 갖다가 우리가 기억하고 그걸 갖다가 우리가 극복하고 그렇게 하자고 하는 한 사람의 학자의 주장을 갖다가 마치 일본에 동조하는 것 아니냐 라는 식으로 왜곡하고 매도하는 것처럼 들려서 상당히 오늘 아침에 지금 저에게 물어본 것은 불공정한 어떤 인터뷰가 아닌가 하는 그런 지금 서운함이 있습니다.

☏ 진행자 > 지금 저는 불공정한 건 대등하게 질의와 응답이 오갔기 때문에 불공정하다라는 그 말씀은 성립이 안 된다라고 저는 말씀을 드리겠고요. 하나만 더 여쭤볼게요. 그러니까 건국 과정이 1919년부터 1948년까지 연속적인 과정이었다고 말씀 하셨잖아요.

☏ 김형석 > 저 그렇게 주장합니다.

☏ 진행자 > 그러면 거기서 가장 중요한 어떤 시점과 계기는 뭐가 되는 겁니까?

☏ 김형석 > 그렇게 참 이분법적으로 말씀을 하시는데요. 지금 광복절의 의미는 본래는 1948년 8월 15일을 독립기념일로 정해서 그 명칭을 독립기념일로 하던 것을 그때 당시에 광복절로 바꾸게 된 계기가 있습니다. 제헌국회에서 백관수 의원이 1948년에 독립도 중요한 것이지만 1945년 8월 15일에 해방도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이 두 가지를 함께 사용할 수 있는 명칭으로서 광복절로 바꾸자고 제안을 해서 그게 제헌국회에 통과 되어지는 겁니다. 그러면 1945년에 일제로부터 우리 민족이 해방되어진 이 중요한 사건과 그 다음에 1948년에 우리 국민들의 자유 총선거에 의해서 우리 국민들이 주권을 찾아서 우리 스스로 우리의 대표자를 선출해서 우리 정부를 수립한 이 독립이라는 두 가지 사건을 놓고서 당신 이 중에서 어느 것을 택하겠냐라고 얘기하는 것은 마치 어린아이들한테 너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하고 억지로 강요하는 거랑 꼭 같은 거예요. 1945년 8월 15일 해방도 아주 중요한 사건이고 1948년 8월 15일에 정부 수립도 굉장히 중요한 사건이다. 두 가치를 아주 동등하게 아주 높게 평가하는 사람입니다.

☏ 진행자 > 그렇습니까? 그럼 제가 이 질문을 드린 취지를 그럼 말씀 드릴게요. 미국의 독립기념일이 7월 4일인 건 알고 계시죠?

☏ 김형석 > 그렇습니다.

☏ 진행자 > 이게 1776년 7월 4일에 독립 선포를 기념해서 독립기념일로 잡은 거 아니겠습니까.

☏ 김형석 > 그렇습니다.

☏ 진행자 > 그런데 미국의 독립전쟁은 그전에 75년에 시작이 됐고 영국군이 완전히 항복한 건 1781년이고 영국이 미국의 독립을 인정한 건 1783년이거든요. 다시 말해서 이렇게 놓고 보면 미국의 독립기념일을 기준으로 한다면 독립의 가장 결정적인 시점을 이때로 잡았다라는 데서 시사하는 바가 있기 때문에 제가 그 질문을 드렸던 거고요. 이것도 중요하고 저것도 중요하다가 아니라.

☏ 김형석 > 아닙니다. 제 얘기를 들어보십시오. 미국의 경우와 우리의 경우를 저도 그래서 미국은 건국 하는 데 13년이 걸렸고 우리나라는 3.1 독립선언으로부터 정부 수립까지 29년이 걸렸다라고 제가 그 과정론을 주장하고 있는 사람입니다만, 미국의 경우와 한국의 경우를 동일시하게 모든 관점을 같이 볼 수는 없는 겁니다.

☏ 진행자 > 어떤 점에서요.

☏ 김형석 > 왜냐하면 미국의 경우에는 이미 13개 주가 자치적인 정부를 구성하면서 영토와 국민이 있었는데 주권만 영국으로부터 받지 못한 겁니다. 그래서 그게 되는 순간에 영국은 우리 주권을 찾겠다고 독립선언하는 순간에 그것을 갖다 하나의 건국으로 봐야 된다고 하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우리가 안타깝게도 국내에서 영토와 그 다음에 국민과 이걸 다 일본한테 뺏기고 그 다음에 주권도 박탈당했고 그래서 우리가 해외에서 임시정부가 망명정부가 있을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저는 우리의 출발점이 아니라 완성을 1948년 8월 15일로 본다고 하는 겁니다.

☏ 진행자 > 시간이 다 돼서 마무리를 해야 될 것 같습니다. 혹시 필요하면 다시 한 번 인터뷰 요청 드리고요. 오늘은 이렇게 마무리하겠습니다.

☏ 김형석 > 네. 얼마든지 좋습니다.

☏ 진행자 > 고맙습니다. 김형석 독립기념관장이었습니다.

[내용 인용 시 MBC <김종배의 시선집중>과의 인터뷰 내용임을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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