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기자의 사談진談/송은석]김정은의 고무보트와 마이바흐

송은석 사진부 기자 2024. 8. 14.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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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31일 북한 노동신문이 공개한 신의주 침수 피해 지역에서 고무보트를 타고 직접 현장을 지휘하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모습. 노동신문 뉴스1

11일(현지 시간) 파리 올림픽 폐회식에 갑자기 등장한 할리우드 톱스타 톰 크루즈. 그는 경기장 꼭대기에서 와이어를 타고 뛰어내리며 등장했다. 오륜기를 이어받은 크루즈는 오토바이 질주부터 스카이다이빙까지 역동적인 스턴트 액션을 영상으로 선보이며 다음 올림픽 개최지인 로스앤젤레스(LA)를 소개했다. 크루즈는 대부분의 영화 속 액션 장면을 대역 없이 직접 연기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세계 최고층 높이의 빌딩 부르즈 칼리파를 직접 오르는가 하면 시속 400km 속도로 나는 비행기 문짝에 매달리기도 한다. 직접 스턴트 연기를 하는 게 관객과의 감정적 연결을 강화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송은석 사진부 기자
지난달 북한의 김정은 국무위원장도 몸을 사리지 않은 ‘스턴트’ 행보로 눈길을 끌었다. 최근 북한은 60년 만의 심한 폭우로 압록강 하류에 있는 신의주와 의주군 일대가 침수됐다. 이에 따라 4100여 가구와 3000여 ha(약 900만 평)의 농경지 및 시설물들이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물에 잠겼다. 그러자 김 위원장은 노동신문과 조선중앙TV 등을 통해 본인이 아끼는 렉서스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을 직접 운전해 바퀴 높이까지 차오른 깊이의 흙탕물을 가로지르는 모습을 연출했다. 그중 압권은 김 위원장이 구명조끼도 없이 직접 고무보트를 타고 침수 지역을 돌아보는 모습이었다. 영상 속 김 위원장이 탄 보트는 물에 잠긴 버스정류장을 지나치다 물살에 휘청거렸다. 배는 그대로 앞에 있던 소나무로 돌진했고 김 위원장은 나뭇가지에 이마를 맞았다. 편집될 법한 이 장면은 조선중앙TV 오전 뉴스에 그대로 보도됐다. 위험도가 높아질수록 현실감은 더해진다. 이를 통해 김 위원장의 ‘애민’ 이미지를 의도적으로 부각하려는 것으로 해석된다.

재해 지역 방문은 국가 지도자의 리더십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척도다. 국가 수장이 피해 지역을 방문하면 전 국민적 관심이 쏠리고 실질적 지원도 따라온다. 문제는 타이밍이다. 너무 늦으면 무관심하다는 비판을 받는다. 그렇다고 너무 일찍 찾는 것도 부담이다. 관계자들이 의전을 수행하느라 구조 복구 작업에 지장을 주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이번 김 위원장의 위험을 무릅쓴 수해 지역 보트 장면은 국내외 외신들이 북한의 수해를 전 세계에 알리는 효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10일 북한 언론을 통해 공개된 김 위원장이 의주군 수재민들을 만난 장면은 늘 완벽한 사진, 영상만 공개하던 이전 북한의 보도와 달리 허점이 많았다.

첫 번째로 장소다. 수재민 수용 시설은 그늘 한 점 없는 운동장에 천막을 친 구조였다. 김 위원장은 텐트 안에 들어가 수재민들에게 직접 가져온 생필품과 구호물품을 나눠줬다. 이때 김 위원장을 보좌하던 간부의 이마에 땀이 비 오듯 쏟아지는 모습이 사진에 포착됐다. 텐트 안에는 20여 명의 수재민이 앉아 있었는데 더위를 식혀 주는 건 단 한 대의 선풍기였다. 그 선풍기 바람마저 ‘애민 지도자’ 김 위원장에게만 향하고 있었다.

두 번째로 아이들이다. 아이들은 통제가 어렵다. 감정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김 위원장의 등장에 환호하고 감동의 눈물을 흘리는 어른들과 달리 아이들은 겁에 질린 듯 표정이 굳어 있었다. 아빠 품에 안겨 강제로 나온 아기는 울음을 터뜨리는가 하면 경호원에게 밀려 뒤로 넘어지는 아이도 사진으로 보도됐다.

반면 10일 의주군 수재민 천막촌을 찾은 김 위원장의 전용열차에선 신형 벤츠 마이바흐 전용차가 사진으로 공개됐다. 노동신문 뉴스1
그중 최악은 김 위원장이 연설 무대로 활용한 전용 열차 내부에 있던 출시 4개월 된 3억 원짜리 신형 벤츠 마이바흐 전용차가 노출된 것이다. 처음 공개된 전경 사진은 오른쪽에서 촬영한 구도가 대부분이었다. 기차 속 자동차를 가리려는 의도가 느껴졌다. 그런데 왼쪽을 담당했던 전속 촬영팀에 의해 자동차가 대외적으로 공개됐다. 의도적인지 실수인지는 알 수가 없지만 재난 리더십에는 맞지 않는 연출이었다. 사전에 차를 가림막으로 가리든지 사진 선별 과정에서 외부로 발행을 하지 않는 게 더 적절했을 것이다.

이번 김 위원장의 수해 대응 모습은 우리나라 대통령 의전 담당 부서가 타산지석과 동시에 반면교사 삼아야 할 좋은 사례다. 일단 어설프게 준비하면 안 하느니만 못하다는 것. 그리고 비록 연출이라도 지도자가 현장에서 적극적으로 대응한다면 좋은 반응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둘 중 하나라도 부족하면 ‘소통’이 아니라 ‘쇼통’이 된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공감이다. 지도자가 현장 속에서 피해자들과 함께 아픔과 책임을 나누는 태도다. 최근 우리 사회 속 재난 상황에서 그런 장면들이 있었나 생각해 보게 된다.

송은석 사진부 기자 silverston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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