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 의병장들의 투쟁정신 생생한 편지, 110년 만에 일본서 돌아왔다

도재기 기자 2024. 8. 14. 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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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유산청, ‘한말 의병 관련문서’ 등 3건 공개···허위·이강년·노재훈·최익현 등의 글 13점
일제 경찰이 압수·보관···탄압 흔적도 고스란히
임시정부 편찬 ‘한일관계사료집’ 등도 환수
항일 독립투쟁을 이끈 의병장들의 투쟁 의지, 자주독립 정신이 오롯이 녹아 있는 편지 등 ‘한말 의병 관련 문서’가 일본에서 환수됐다. 편지 등 문서를 일제 경찰이 두루마리 형태로 만든 ‘한말 의병 관련 문서’를 일부 펼친 모습. 국가유산청 제공

일제에 맞서 목숨을 내걸고 항일 독립투쟁을 벌인 의병들의 육필 편지 등 관련 문서가 국내로 돌아와 처음 공개됐다.

광복절을 하루 앞둔 14일 공개된 의병 관련 문서들은 의병 등 당시 독립운동가들의 꺾이지 않는 항일 투쟁의지, 자주독립의 간절한 열망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일본에서 환수한 이들 문서는 최초로 확인된 유일본 자료로, 항일 독립운동사 연구 등에 획기적인 사료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일제 경찰이 빼앗아 보관한 문서들로, 당시 의병과 독립운동에 대한 일본의 시각, 폭력적 탄압 상황도 볼 수 있다.

‘한말 의병 관련 문서’를 펼친 모습. 문서들 사이 사이에는 일제 경찰이 기록한 글들이 첨부되어 있다. 국가유산청 제공

국가유산청과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은 이날 국립고궁박물관에서 ‘한말 의병 관련 문서’, ‘한일관계사료집-국제연맹 제출 조일(朝日)관계사료집’, 시를 나무 판에 새긴 시판인 ‘조현묘각운(鳥峴墓閣韻)’ 등 환수 문화유산 3건을 언론에 공개했다.

공개된 ‘한말 의병 관련 문서’는 허위(1855~1908)와 허위의 셋째 형이기도 한 허겸(1851~1939), 이강년(1858~1908), 노재훈(?~?), 윤인순(1880~1909) 등 항일 의병장과 독립운동가들이 작성한 편지 등 문서 9건, 유학자이자 항일 의병장 유인석의 스승인 유중교(1821~1893)와 의병장 최익현(1833~1906)의 편지 4건 등 모두 13건으로 구성됐다. 최익현의 편지 등 4건은 1918년 4월 의병장 유인석의 시문집인 ‘의암집(毅庵集)’이 제작되던 현장에서 일제 헌병경찰이 빼앗은 것으로 확인됐다.

이들 13건의 문서는 두 축의 두루마리 형태(세로·가로 각 35×406.5㎝, 35×569.5㎝)로 정리돼 꾸며졌다. 각 두루마리에 덧붙여진 글을 통해 ‘芥川長治’(개천장치)란 이름으로 조선총독부 등에서 일한 일제 헌병경찰이 이 문서들을 수집한 뒤, 1939년 8월에 지금과 같은 형태로 만들었다. 특히 두루마리에 첨부한 글에는 ‘이것은 일한(日韓) 병합 전후의 이면사(裏面史)에 관한 유일무이한 진사료(珍史料)’라는 내용을 적어 놓기도 했다.

의병 관련 문서들 가운데 1908년 당시 의병장 허위의 문서(위)와 의병장 노재훈의 문서(아래) 세부 모습. 국가유산청 제공

13건의 문서는 구체적으로, ‘13도 창의군’(1907년 경기 양주에서 조직된 항일 13도 연합의병부대)에서 활동한 이강년이 1908년 1월 5일(음력)에 허위에게 보낸 글, 1908년 4월 의병장 연기우(?~1911), 1908년 5월 24일 노재훈의 글을 포함해 의병장 황순일, 윤인순의 글로 이어진다.

또 허위가 일제 경찰에게 붙잡힌 당일(1908년 5월 13일)에 작성한 문서와 그 이전의 글, 허겸이 1908년 3월과 5월 17일에 쓴 글, 유중교가 제자인 유인석에게 보낸 글(1876년 2월3일), 최익현(최기남)이 1851년과 1876년에 걸쳐 유중교에게 보낸 글 등이 있다. 허위가 일제 경찰에게 붙잡힌 당일 쓴 글에는 ‘가히 사방(四方)을 고동(鼓動)시켜 대사(大事)를 장차 이루려고 한다’는 내용도 있다.

특히 허겸이 동생 허위가 일제 경찰에 잡힌 후 쓴 글(1908년 5월 17일)에는 ‘분통해서 죽고자 하여도 무어라 형언할 수 없다’고 썼다. 또 ‘진실로 마땅히 만 배나 분려(忿勵)해야 하고, 같은 마음으로 협력하며, 대사(大事)를 공동으로 도모하고, 서로 사랑하고 서로 보호하기를 전보다 배가한 연후에야 거의 국권(國權)을 회복하고 생령(生靈)을 보전하며, 강토(疆土)를 온전히 할 수 있을 것’이라며 의병 부대들의 단합을 강조했다.

의병 관련 문서들 가운데 의병장 최익현의 문서(위)와 의병장 이강년의 문서(아래). 국가유산청 제공

노재훈은 1908년 5월 24일 쓴 편지에서 ‘우리 군사장 왕산 선생(허위)이 체포돼 눈물을 금할 수없다’ ‘우리 대한(大韓)의 일은 어찌 이에 이르도록 참혹한지요?’ ‘무릇 전국 동지(同志)의 사람들이 어찌 각골명심(刻骨銘心)하여 흥복(興復)의 희망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겠습니까?’ 등의 내용을 적었다.

국가유산청은 “의병 관련 문서는 지난 7월 복권기금을 통해 일본에서 구입했다”며 “허위의 문서와 허위의 체포를 통탄해 하면서도 각 의병 군진들의 협력을 촉구하는 허겸·노재훈의 문서 내용은 불굴의 항일 항전의지를 여실히 보여준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를 더한다”고 평가했다.

‘한말 의병 관련 문서’ 두루마리 모습(왼쪽)과 ‘의암집’ 제작 현장을 급습해 문서 일부를 탈취한 정황을 기록한 일제 경찰의 글(오른쪽). 일제 경찰은 두루마리에 의병과 독립운동가들을 일본을 배척한 ‘폭도’ ‘우두머리’ 등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국가유산청 제공

일제 헌병경찰인 개천장치는 각각의 두루마리에 ‘한말 배일 거괴지척독(한말 일본을 배척한 우두머리의 편지)’ ‘한말 배일 폭도장령격문(한말 일본을 배척한 폭도 장수의 격문)’이라고 제목을 적었다.

당시 탄압 대상인 의병에 대한 일제의 시각이 잘 드러난다. 또 허위와 이강년을 체포한 사실, ‘의암집’ 제작 현장을 급습한 사실 등도 기록하고 있다.

박민영 원광대 원불교사상연구원 책임연구원은 이날 “13건의 문서는 이번에 처음 확인되는 유일본 자료들”이라며 “의병 부대들의 투쟁 의지, 군사적 협력, 갈등 양상 등 구체적 활동 내용이 기록돼 학술적으로 귀중한 사료”라고 평가했다.

박철상 한국문헌문화연구소장은 “의병장 최익현의 편지 중 초명(아명)인 최기남으로 쓴 편지는 처음 발굴된 것”이라며 “서예사적 측면에서 각 의병 부대들의 인장을 확인할 수 있는 것도 의미가 크다”고 밝혔다. 국가유산청은 “이들 기록을 통해 일제의 의병 탄압행위 등을 확인할 수 있고, 일제의 문서 입수경위가 명확하다는 점에서 학술적 가치가 더 높다”고 밝혔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1919년 편찬한 ‘한일 관계사료집-국제연맹 제출 조일 관계사료집’(전 4권)은 현재 4권 완질로 남은 것은 단 3질 뿐이다. 국가유산청 제공

이날 공개된 ‘한일관계사료집-국제연맹 제출 조일(朝日)관계사료집’(전 4권 완질)은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국제연합(UN) 전신인 국제연맹에 우리 민족의 독립을 요구하기 위해 편찬한 역사서다.

항일 독립운동사 연구의 소중한 자료인 ‘한일관계사료집’은 편찬 당시 모두 100질이 제작됐으나, 현재 온전한 완질로 전해지는 것은 단 3질 뿐이다. 독립기념관과 미국 컬럼비아대 동아시아도서관 2곳에 완질 소장본이 있을 뿐이다.

이 ‘한일관계사료집’은 지난 5월 재미동포 홍영자씨가 “고국에서 가치 있게 활용되기를 바란다”며 아무런 조건 없이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에 기증했다. 이 사료집은 홍씨의 남편인 고 이순원 박사(뮬런버그대 교수)가 1970년대 초 중국을 방문했을 당시 조선족 동포들로 부터 선물로 받은 것이다.

‘한일관계사료집’ 각 4권 모두 첫머리에는 집필자 중 한 명인 독립운동가 김병조(1877~1948)의 인장도 찍혀 있다. 박민영 책임연구원은 “‘한일관계사료집’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직접 출판한 유일한 역사서라는 의미와 가치가 있다”고 밝혔다.

독립운동가 송진우의 부친이자 담양학교 설립자인 송훈의 시를 나무판에 새긴 ‘조현묘각운’ 시판. 국가유산청 제공

‘조현묘각운(鳥峴墓閣韻)’ 시판은 독립운동가 송진우의 부친이자 담양학교 설립자인 송훈(1862~1926)의 시를 나무판에 새긴 것이다. 전남 담양군 광덕리 조현에 새 묘각 건립을 기념해 후손의 번창을 바라는 내용으로 지은 시다. 이 유물은 소장자이자 일본 도쿄에서 고미술 거래업체를 운영하는 김강원 대표가 지난 6월 기증했다.

국가민속문화유산으조 지정된 ‘면암 최익현 관복 일괄’ 중 최익현이 머리에 썼던 관모(사모)와 신분증인 호패(사진 위), 사진 아래는 최익현이 입었던 관복인 단령. 국가유산청 제공

이날 환수 문화유산 공개 현장에는 13일 국가민속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항일 의병장 최익현이 입었던 의복 등 ‘면암 최익현 관복 일괄’이 함께 공개됐다. 최익현이 입었던 관복(단령), 머리에 썼던 관모(사모), 장식을 한 관복 허리띠(삽금대), 신분증인 호패, 목이 긴 형태의 신발(목화) 등이다. 최응천 국가유산청장은 이날 “공개된 환수 문화유산은 국외의 문화유산을 되찾아 왔다는 단순한 물리적 회복을 넘어 항일 독립투쟁 등 선조들의 정신을 오롯이 회복하는 값진 성과라 더욱 뜻 깊다”고 밝혔다.

도재기 선임기자 jaek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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