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 상병 사건, 율곡이라면 탄핵의 소(疎) 썼을 것입니다”

한겨레 2024. 8. 14.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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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이 잡념잡상 _06 유학자 김충호 (상)
일러스트레이션 유아영

“선조 7년(1574), 율곡이 황해도 관찰사에서 물러나 처가인 해주 살 때 일입니다. 사직했으니 녹봉이 없지요. 관찰사면 지금의 도지사 벼슬인데 모아놓은 재산도 없고 살림이 곤궁했어요. 식구는 수십 명이고. 그래서 집에 대장간을 차립니다. 관인이 딱하게 여겨 쌀을 좀 보내오는데 그것을 돌려보냅니다. 낫 호미 같은 농기구를 손수 만들어 팔면서 생계를 이어갑니다. 이항복 ‘백사집’에 ‘의리상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면 대인은 부끄러워하지 않고 행하였다’고 이 일을 전합니다.”

그는 덧붙였다. “‘선조수정실록’ 졸기에 나오지요. ‘이조판서 이이(李珥)가 졸(卒) 하였다. 향년 49세. (…) 이이는 경중(서울)에 집이 없었으며, 집안에도 남은 곡식이 없었다. 친우들이 부의를 거두어 염하고 장례를 치른 뒤 조그만 집을 사서 가족들에게 주었다. (…) 나아가고 물러나고 사양하고 받아들이는(出處辭受) 일이 한결 같았으며 (…) 한 시대를 구제하는 일을 급선무로 여겼기 때문에 사심 없이 할 말을 다하다가 주위에서 꺼리는 대상이 되었다.’ 이것이 실학이고 유학입니다. 조선 사대부 중에 농사 지어 본 사람, 나무 한 짐 해 본 사람, 달군 쇠를 담금질 해본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요?”

유학자 김충호(金忠浩). 1948년 광주 충효동 무등산 자락, 충장공 김덕령 생가마을에서 그의 33대 손으로 태어났다. 자는 맹서(孟恕), 호는 고당(古堂), 본관은 광산이다. 14살에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가난하여 중학교에 못 갔다. 어느 날 조부가 돈을 주면서 술과 봉초담배를 사오라 하여 막걸리 두 되와 ‘풍년초’를 사왔다. 그것을 들고 서당에 가서 ‘추구’(推句)를 시작했다. 이 대목, ‘논어’의 ‘속수’(束脩) 같다. 속은 묶음이고 수는 말린 고기다. ‘자왈, 스스로 속수 이상의 예를 행하는 사람에게 일찍이 가르쳐주지 않은 적이 없노라’. 사제의 폐백으로 북어 한 쾌나 육포 한 축은, 월사금의 하한선 쯤 되어 보인다. 속수는 ‘유교무류’(有敎無類)로 이어진다. 가르침이 있을 뿐 무리 짓지 않는다, 교육에 차별은 없다는 뜻이다. 당시 교육은 귀족의 특권이었다. 공자가 그 문을 활짝 열어 공문(孔門)에 빈부귀천이 없었다. 아버지는 논에 나가고 소년, 막걸리와 풍년초를 들고 사립문을 나선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는 조부의 눈길이 눈에 선하다.

6년이 흘러 소년은 스무 살 청년이 되었다. 전북 고부에 살던 양재(陽齋) 권순명을 찾아간다. 양재는 간재(艮齋)의 문인이다. 구한말 유림은 4대 학파로 나뉜다. 이항로의 화서학파, 기정진의 노사학파, 전우의 간재학파(기호), 이진상의 한주학파(영남). 간재 전우(田愚)는 율곡의 기호학파를 이어 조선 성리학의 마지막을 장식한 대표적 인물이다. 간재학파는 1910년 경술국치 직후 서해 도서벽지를 돌며 은자의 길을 택했다. 청년은 양재 문하에서 본격적인 유학의 길로 들어선다. 자식 뒷바라지를 위해 아버지가 광주의 전답을 팔아 고부에 논밭 아홉 마지기를 마련하고는 온 식구를 솔거하여 터전을 옮겼다. 고당은 농사짓고 책 읽는 틈틈이 제자를 가르쳤는데 화랑과 출판사로 유명한 ‘학고재’ 대표 우찬규가 그 중 한명이다.

“동문 학우가 부탁을 해요, 아이를 하나 받아달라고. 찬규가 초등학교 졸업하고 가난해서 중학교를 못 갔어요. 내 어릴 때하고 형편이 같잖아요, 그래서 같이 살면서 공부하는 내(內)제자로 받았는데 하나를 가르치면 둘을 알았지.”

“그 때, 속수는 좀 가지고 왔습니까?”라고 물었더니, “쌀 한 톨도 안 가져왔어”하면서 웃는다. 훗날 서울에서 가끔 만나 회포를 풀고, 지금도 안부한다고 한다.

1979년 31살, 조모는 노환에, 부친은 풍에 걸려 동시에 병환이 났다. 몇 달 약값을 대다가 형편이 바닥났다. 염치불구하고 한의원에 부탁하여 처방전을 필사하는 허락을 얻었다. 장에서 약재를 사서 달이니 돈이 덜 들었다. 그러나 오십보백보였다.

나 공부한다고 이러다가 식구들이 죽게 생겼구나, 고당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서울 행을 결심한다. 마침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조선역사자료를 번역 정리할 구인공고가 났다. “3명을 뽑는데 상투 틀고 갓 쓴 사람, 한복에 수염 긴 사람, 옛날 과거 보듯이 전국에서 150명이 몰렸어요. 경전을 초서로 쓴 문장 중에 오탈자를 찾는 문제가 나왔어요. 8할은 답을 쓰고 나머지는 모르겠어, 내가 이것 밖에 안 되는구나 했는데 열흘 지나 합격통지가 왔습디다.”

고려대학 뒤편에 하숙을 구하고 서울생활을 시작했다. 문교부 정직은 아니고 임시직으로 ‘각사등록’(各司謄錄) 번역 일을 했다. 각사등록은 임진왜란 이후부터 1910년 대한제국 때까지 지방관아와 중앙관청 사이에 오간 공문서다.

“내가 한복을 입고 출근했어요. 하루는 위원장이 부르더니 여기는 직장이니까 출퇴근 할 때 양복을 입으라는 거라. 아니 국사를 편찬하는 곳에 민족 옷을 입고 다니는 게 무슨 잘못이냐고 따져 물었지. 그래도 안 된다는 거요. 그만 다닐까 고민했어요. 병중의 아버님 좋은 약이라도 해드리려고 올라왔는데, (…) 그때 내가 양복을 입었습니다. 좀 곱게 봐주지, 옷이 무슨 문제라고, 그러나 지금도 부끄러운 일입니다”라고 했다.

그 무렵 단국대 동양학연구소에서 일석 이희승을 소장으로 초빙, ‘한한(漢韓)대사전’을 편찬하는 중이었다. 그 일에 합류하여 25년을 일하고 전문연구원으로 정년했다. 한한대사전은 1978년 착수하여 30년 만인 2008년 전질 16권을 완간하기까지 수많은 학자들이 참여, 42만 단어의 뜻과 출전을 밝힌 장대한 사업이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1천년 역사의 성균관은 껍질만 남았다. 강독 소리는 사라지고, 해마다 제사 두 번 지내는 봉사(奉祀)기능이 전부였다. 1990년 고당이 관장을 찾아가 성균관 부설로 ‘한림원’을 재건한다. 기초(학정계재) 2년, 고급(한림계재) 3년의 학제를 마련, 기틀을 다지고 한림원장을 맡아 18년을 강의했다. 수많은 후학이 배출되었으며, 이 과정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고당은 이때 밤낮없이 일했다. 낮에는 단국대로, 밤에는 한림원에 나가고 대학 강의도 뛰었다. 그렇게 몇 년이 흘러 작은 아파트를 마련했다. 그간 처자식 다섯 식구가 셋방살이를 하다가 내 집을 얻은 그 즉시 고부의 부모를 서울로 모셨다.

관악산 뒷자락 동편마을에서 만난 고당은 이 염천에 탕건 쓰고, 흰 바지, 저고리에 두루마기를 갖춰 입은 옛 선비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가 독주를 즐겨한다 하여, 단골 중국집에서 꼬막껍질 같은 잔에다가 백주를 나눴다. 낯빛은 밝고, 웃을 때는 아이들이 웃는 듯했다. 부친 병구완 얘기를 할 때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기도 했다. 중풍에 돼지수육은 의사가 금했지만 워낙 좋아하시던 것이라 가끔 막걸리랑 해드렸다 한다. 일곱 식구가 서울서 살다가 아버지가 세상을 떴다. 고당은 삼년상을 치른다.

“아파트에서 어떻게 삼년상을 치르셨냐?”고 물었더니, “거처 하시던 방에 조석으로 메 올리고, 갱 올리고, 나물소찬 영정 아래 차려놓고 출근할 때 곡하고 절하고, 퇴근해서 곡하고 절하고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10년 뒤 모친이 세상을 떴을 때도 똑같이 삼년상을 치렀다 한다.

그는 율곡의 ‘경장’(更張)을 얘기했다. “거문고 줄이 느슨하면 연주를 할 수가 없지요? 팽팽하게 조이거나 새 줄로 갈아야 합니다. 온갖 폐단으로 기강과 언로가 무너진 세상을 개혁하여 거문고에서 제 소리가 나게 하는 일, 그것이 ‘경장’입니다.”

그는 왕조시대의 개혁은 지금의 혁명 못지않은 것이라면서, 이 정부 최악의 일로 ‘채상병 사건’을 꼽았다. “이 사건은 한마디로 백성을 ‘졸’(卒)로 보는 것”이라면서 “병조판서를 지낸 율곡이 이 시대에 살아 그 격노를 접했다면 바로 붓을 들어 ‘탄핵의 소(疏)’를 쓰고 사직했을 것”이라고 했다.

이광이 | ‘정말로 바다로 가는 길을 나는 알지 못하지만, 그러나 바다로 가는 노력을 나는 그쳐본 적이 없다’ 목포 김현문학관에 걸린 이 글귀를 좋아한다. 시는 소질이 없어 못 쓰고 그 언저리에서 ‘잡글’을 쓴다. 삶이 막막할 때 고전을 읽는다. 머리가 많이 비어 호가 ‘반승’(半僧)이다. 동화 ‘엄마, 왜 피아노 배워야 돼요?’와 책 ‘절절시시’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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