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양심들이 함께 받아낸 배상 판결…“왜 한국정부가 부정하죠?”

김소연 기자 2024. 8. 14. 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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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수십년째 피해자 돕는 일본인 3인
지난달 17일 만난 나카타 미쓰노부 ‘일본제철 전 징용공 재판을 지원하는 모임’ 활동가 모습. 교토/김소연 기자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해 3월 한-일 관계 최대 쟁점인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과 관련해 일본 기업 대신 한국의 재단이 돈을 내는 ‘제3자 변제’를 강행하면서 피해자들의 고통이 더욱 커지고 있다. ‘제3자 변제’ 수용 여부로 피해자들이 갈라졌고, 일본 쪽에선 ‘한국이 알아서 할 문제’라며 아예 남의 일 보듯이 하고 있기 때문이다. 강제동원 피해자뿐만 아니라 이들을 수십 년째 지원하는 일본의 양심적인 시민사회도 큰 상처를 받았다.

오는 15일 광복 79돌을 맞지만, 강제동원 문제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셈이다. 지난달 10~11일, 17~18일 일본 도야마·교토·오사카에서 강제동원 피해자를 짧게는 27년, 길게는 45년째 돕고 있는 일본 시민사회 활동가 3명을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얼마나 억울했으면 50년이 지나도 저렇게 분노하실까. 뭐라도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지난달 17일 교토에서 만난 나카타 미쓰노부(70) ‘일본제철 옛 징용공 재판을 지원하는 모임’ 활동가는 1997년 강제동원 피해자인 고 여운택(1923~2013) 할아버지를 처음 만난 순간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고 말했다. “여 할아버지는 ‘내가 그때 (일본제철로부터) 돈을 제대로 받았으면 소를 살 수 있었고, 내 인생이 달라졌을 것’이라고 말했어요. 70살이 넘은 그때까지 마음에 안고 사셨던 거죠.”

여 할아버지는 스무 살이던 1943년 6월 일본제철 오사카제철소로 강제동원 돼 용광로에 고철을 넣는 고된 노동에 시달렸다. 부족한 식사와 강압적이고 열악한 노동환경도 참기 힘든데, 임금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지옥 같은 노동은 1945년 8월 일본의 패망으로 끝날 수 있었지만, 일본제철의 사죄·배상 등 강제동원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못하고 있다.

2005년 2월28일 일본제철 강제동원 피해자인 여운택·신천수·김규수·이춘식 할아버지가 서울지방법원에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기 앞서 관련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나카타 미쓰노부(사진 가운데) ‘일본제철 전 징용공 재판을 지원하는 모임’ 활동가가 발언을 하고 있다. 본인 제공

“2018년 대법원에서 이겼을 때 너무 기쁘면서도 슬펐습니다. 획기적인 판결이었지만, 결과가 너무 늦게 나오면서 소송에 나선 4명 중 3명의 할아버지가 이미 돌아가신 뒤였죠.” 1997년 12월 여운택·신천수가 오사카지방재판소에서 손해배상 소송을 시작했지만 2003년 10월 일본 최고재판소에서 패소했다. 2005년 두 사람에 외에 김규수·이춘식 등 4명이 원고가 돼 서울중앙지법에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고, 2018년 대법원에서 최종 승소했다. 일본 소송까지 합하면 21년 만에 쾌거였다.

시간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40대 초반 교토시 공무원이던 나카타 활동가는 올해 70살이 됐다. 공무원노조에서 활동하며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한국인 징용공 소송을 좀 도와달라’는 요청에 가벼운 마음으로 응했고 “이렇게 오랫동안 함께 할지 몰랐다”고 말했다. “한·일을 오가며 여운택·신천수 할아버지와 밥 먹고, 자다 보니 어느새 가족처럼 됐어요.”

한국인 강제동원 피해자를 찾아내 법률 지원에 나서는 것은 물론, 일본 전범 기업을 상대로 항의 투쟁을 하고, 대국민 선전 활동에 모금 운동 등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긴 투쟁은 일본 시민사회의 헌신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2005년 1월22일 일본 시민사회가 만든 ‘한국원폭피해자를 돕는 시민모임’ 관계자들이 경기도 평택에 있는 한국원폭피해자협회 기호지부 사무실을 찾아 얼마전 나온 히로시마 고등재판소 판결 결과를 설명하고 있다. 가운데 짧은 머리의 여성이 이치바 준코 ‘한국원폭피해자를 돕는 시민 모임’ 대표다. 본인 제공

일본제철 강제동원 투쟁의 역사를 한참 설명하던 나카타 활동가는 일본 기업 대신 한국의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위로금을 내는 ‘제3자 변제’ 얘기가 나오자,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는 “각자 사정이 있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같이 싸우던 피해자들이 갈라져 착잡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2018년 대법원 판결엔 강제동원 피해자의 인권을 어떻게 지키고, 회복할 것인지가 담겼다”며 “이것을 왜 한국정부가 스스로 부정하는지 이해하기 힘들다”고 비판했다. 나카타 활동가는 “일본 사회는 ‘역사 부정’ 등 점점 나빠지고 있다. 과거를 제대로 마주 보는 것은 일본을 위해서라도 꼭 필요한 일”이라며 “이 싸움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지난달 10일 도야마에서 만난 나카가와 미유키(63) ‘후지코시 소송을 지원하는 호쿠리쿠연락회’ 사무국장도 28년째 강제동원 피해자를 돕는 ‘일본의 양심’ 중 한 명이다.

“1992년 뉴스에서 흰색 한복을 입은 후지코시 강제동원 할머니들을 봤어요. 문제를 해결하라며 눈물을 흘리면서 소리를 지르는 영상이었는데, 굉장히 충격을 받았습니다.” 도야마에서 대학을 다니며 학생운동을 하던 나카가와 국장은 1996년부터 본격적으로 후지코시 문제에 뛰어들었다.

한겨레 그래픽

도야마에 있는 후지코시는 태평양전쟁 말기인 1944~1945년 한반도에서 12~16살 소녀 1089명을 근로정신대로 동원해 혹독한 노동을 시켰다. 1992년 3명의 피해자가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고, 무기한 단식 등 강력한 투쟁으로 2000년 7월 일본 최고재판소에서 후지코시가 위로금을 지급하는 등 ‘화해’를 이뤄냈다. 이를 시작으로 2002년엔 변호사·종교인·시민들이 후지코시 강제동원 피해자의 소송을 돕는 ‘제2차 호쿠리쿠 연락회’를 만들어 본격적인 소송 투쟁에 나섰다. 2003년 도야마재판소에 소송을 제기했고, 긴 법정 싸움을 했지만 2011년 일본 최고재판소에서 패소했다. 2013~2014년 서울중앙지법에 소송을 다시 제기해 올해 1월 대법원에서 최종 승리했다. 승소자는 모두 41명, 직접 피해자 중에선 8명만 생존해 있다.

“2010년에 후지코시 도쿄 사무소 앞으로 항의 집회를 하러 갔어요. 김정주 할머니가 빌딩 안으로 몰래 들어가 15층에 고립돼 몇 시간을 소리를 치며 저항을 했습니다. 후지코시가 난리가 났죠.” 나카가와 국장은 “피해자들은 정말 필사적으로 싸웠다”고 했다. 이들의 분노를 잘 아는 그는 ‘제3자 변제’에 대해 “화가 난다”고 말했다. “한·일 정부의 철저한 외면 속에서 피해자들이 외롭게 싸웠다. ‘제3자 변제’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방해하는 방안”이라고 비판했다.

‘제3자 변제’를 거부하는 피해자들도 있어 싸움이 더욱 길어지게 됐다. 나카가와 국장은 “강제동원 문제는 나도 당사자”라며 “일본에서 자이니치(재일동포)와 외국인 노동자 등이 여전히 차별을 받고 있다. 일본 사회를 조금이라도 바꾸기 위해 과거 식민지배의 책임을 묻는 싸움은 계속할 것”이라고 밝혔다.

지난달 18일 오사카에서 만난 이치바 준코(68) ‘한국원폭피해자를 돕는 시민 모임’ 대표는 45년 동안이나 한국인 피해자들과 함께 하고 있다. 히로시마현 출신으로 약대에 진학한 이치바 대표는 1975년 대학 1학년 때 한국인 원폭 피해자 문제를 접하게 되면서 인생이 달라졌다. 목숨을 걸고 일본에 밀항한 뒤 자신의 원폭 피해를 호소했던 ‘손진두 투쟁’을 통해 한국인 원폭 피해 사실을 알게 됐고 1979년부터 본격적으로 이 문제에 뛰어들었다.

후지코시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2010년 3월9일 일본 도야마에 있는 후지코시 공장 정문에서 항의 집회를 하고 있다. 할머니들 뒤에서 황색 점퍼를 입고 우산을 들고 있는 사람이 나카가와 미유키 ‘후지코시 소송을 지원하는 호쿠리쿠연락회’ 사무국장이다. 본인 제공

“1979년 1월 원폭 피해 실태를 조사하기 위해 처음으로 한국에 갔어요. 2주 동안 머물렀는데, 충격을 받았습니다.” 가난한 원폭 피해자들은 병원조차 갈 수 없어, 약초를 먹으며 고통을 참아내고 있었다. 강제동원에 원폭이라는 ‘2중 피해’를 당한 미쓰비시중공업 히로시마 조선소·기계제작소 출신들이 1967년 한국원폭피해자협회를 만들어 투쟁을 시작했지만, 상황이 크게 달라지지 못했다.

일본 시민사회의 도움을 받아 1995년 12월 히로시마에서 강제동원과 피폭 관련해 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에 들어갔다. 아무리 싸워도 이길 수 없을 것이라며 소송에 반대하는 사람도 많았다. 이치바 대표는 “그때 피해자인 박창환씨가 ‘우리가 지더라도 당시 미쓰비시에서 어떤 일을 당했는지 재판을 통해 역사에 남길 수 있다’고 설득했고, 진술할 수 있는 몸 상태를 가진 46명이 참여했다”고 설명했다.

조금씩 벽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2007년 일본 최고재판소에서 한국인 원폭 피해자에 대한 일부 배상이 인정됐다. 광복 뒤 62년 만에 이룬 큰 성과였다. 이후 법정 소송을 계속 이어가면서 지금은 일본 피폭자에 준하는 혜택을 받고 있다. 강제동원 소송은 2000년 5월 부산지법에 소송을 제기해 18년 만인 2018년 11월 대법원에서 최종 승소했다.

지난달 10일 도야마에서 만난 나카가와 미유키(사진 왼쪽) ‘후지코시 소송을 지원하는 호쿠리쿠연락회’ 사무국장과 지난달 18일 오사카에서 만난 이치바 준코 ‘한국원폭피해자를 돕는 시민 모임’ 대표. 도야마 오사카/김소연 기자

하지만 ‘제3자 변제’가 나오면서 문제가 꼬여버렸다. “한국에서 ‘제3자 변제’라는 방안이 나올 것이라고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어요. 너무 실망했습니다.” 이치바 대표는 “제3자 변제를 수용한 피해자가 있기 때문에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사죄·배상을 받아내기 더 어려워졌다”고 우려했다.

“그래도 싸워봐야 하지 않겠냐”는 이치바 대표는 늘 간직하고 있는 말이라며 미쓰비시에 강제동원 됐다가 원폭 피해까지 당한 고 정창희(1923~2012)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꺼냈다. 정 할아버지는 한국원폭피해자협회 사무국장을 맡으며 평생 일본을 상대로 싸워 온 인물이다. 이치바 대표는 그가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 만남에서 “어떻게 평생을 싸울 수 있었냐”고 물었고, 정 할아버지는 “언젠가는 좋은 일이 있을까 싶어 여기까지 왔다”고 답했다고 한다. 이치바 대표는 “나도 마찬가지다. 싸우는 한국 피해자와 끝까지 함께 하겠다”고 말했다. 정창희의 아들 정종건(67)은 지난 3월 도쿄에 있는 미쓰비시 본사를 찾아 “제3자 변제를 거부하고, 아버지의 투쟁을 이어가겠다”고 밝혔다.

도야마·교토·오사카/김소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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