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농민신문’과 맺은 인연

관리자 2024. 8. 14. 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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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 속 수필 즐겨 읽다 투고 도전
현실반영 작품 써 ‘신춘문예’ 당선
‘촌부작가’에 농민신문은 ‘내 텃밭’

# 눈물겹던 원고료

가을의 전령사 마타리꽃을 기다리며 ‘농민신문’과 나의 인연을 생각한다.

1987년, 농부와 결혼해 시댁으로 들어왔다. ‘농민신문’은 매주 마루에 놓였다. ‘농민신문’은 전국 농어촌 소식통이니 자연스럽게 읽게 됐다. ‘독자투고란’, 독자의 글을 기다린다고 했다. 농촌 이야기라면 대환영이라고 했다. ‘나도 써봐?’ 구미가 당겼다.

그때 나는 농부와 시어머니를 따라다니며 농사일을 배우느라 코피를 쏟았지만 노동은 내게 설익은 수박이었고, 자칫 잘못하면 깨어져 나뒹굴기밖에 못하는 반거충이었다. 펜대만 굴리던 나였다. 내게 맞지 않는 옷을 별생각 없이 걸쳤고, 벗어버리고 싶을 때는 이미 두 아이의 엄마였다. 갈증이 났다. 참신하고 맑은 영혼 하나가 찌들어가는 느낌이었다. 탈출구가 필요했다. 잘 다니던 직장을 때려치우고 농촌행을 택할 때는 나름대로 꿈이 있었다. 전원생활을 하며 쓰고 싶은 글을 원 없이 쓸 수 있겠다는 단순함이었다. 그때까지 나는 인생의 참맛이 뭔지도 모르는 철딱서니 없는 문학소녀였다고 할까.

사랑을 속삭일 때는 거짓말도 참말 같다. 글만 쓰게 해주겠다는 남자, 부지런하고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주는 남자에게 반해서 철밥통도 아까운 줄 모르고 던져버렸던 용기는 어디로 갔을까. 자연의 품에 안겨 한창 인기리에 방송되던 드라마 ‘전원일기’의 복길네처럼 살 줄 알았던 나는 쓴맛이 고여 입맛을 잃어갔다.

그즈음, 나의 숨을 틔워준 것은 ‘농민신문’의 네모 틀 속에 담긴 ‘농촌일기’ 한 꼭지였다. 나는 결혼과 함께 내 꿈을 포기하기 싫었다. 가족 몰래 원고지 칸을 메꿔 독자투고 담당자 앞으로 원고를 보냈다. 처음 내 짧은 수필이 실렸다. 그것은 막혀가던 내 숨통을 틔워준 청량제였다. 그때 원고료 5만원은 눈물겨운 돈이었다.

# 내 텃밭 같았던 ‘농민신문’

그 후로도 내 글은 독자란에 수시로 실렸다. ‘농민신문’은 내게 자신감을 줬다. 이런저런 공모전과 백일장에 나가 크고 작은 상을 받았다. 작가에 대한 도전기였다. 글쓰기는 내게 삶의 틈새에 낀 바람을 잠재우는 일이며 틈새에 낀 때를 씻어주는 샘물이었다. 나만이 할 수 있는 것, 논밭을 오가는 사이에도 읽을 책과 볼펜과 메모지를 챙겼다. 농촌의 현실을 반영하는 글쓰기를 멈출 수 없었다.

“시집온 여자가 살림 두량 잘하모 되제. 낫 놓고 기역 자는 몰라도 콩인지 풀인지 알모 된다. 헛심 쓰지 마라.”

시어머니의 꾸지람을 들어도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렸다. 나는 틈만 나면 글을 썼다. 그 덕에 ‘농민신문’ 생활수기 등 이런저런 공모전에도 당선됐다. 근근이 살아가는 농민들, 개발이란 명목으로 변해가는 농촌 풍경이 내 글에 담겼다. 나는 거창한 글보다 소박하고 소소한 농촌의 삶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소설 역시 그랬다. 현실 반영한 여운이 남는 글. 내가 글을 쓰는 이유고, 내가 사는 이유였다.

1992년 시댁에서 분가했다. 산골짜기 다랑논을 밀어 염소 방목을 시작했다. 나는 염소지기였다. 10년 후, 집 앞으로 관광순환도로가 나면서 염소 방목을 접을 수밖에 없었지만 내게 염소와 개·닭은 가족이었다. 그 둑이 터져버렸다. 국가에서 주는 보상금으로는 집 한채 짓기도 어려웠다. 주택융자를 얻어 집을 짓고 빚을 내서 집 앞 묵정이를 얻어 개간했다. 우리 동네 첫 고사리 재배농가가 됐다.

그리고 1997년, ‘농민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됐다. 나라에는 외환위기가 닥쳤다. 정들었던 이웃, 젊은 농민들 여러 가구가 이농하거나 도산하고 고향을 떠났다. 축산농가는 소를 팔고 텅 빈 축사를 보며 울었고, 집과 땅을 압류당하고 빈손으로 도시로 떠나는 가족을 보며 눈물로 배웅해야 했다.

우리 집 역시 휘청거렸다. 젊은 농부들은 서로 재산 보증을 서거나 연대 보증을 서주는 것이 예사였는데 그게 화근이 됐다. 이웃간에도 친구 사이에도 불신의 벽이 생겼다. 슬펐다.

그때, 신춘문예 당선작이었던 소설이 4개월여간 ‘농민신문’에 연재됐다. 상금으로 산 컴퓨터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매주 연재 글을 다듬어 디스크에 넣어 면사무소로 갔다. 직원에게 부탁해 작품을 보내고 내 소설이 실린 ‘농민신문’을 기다리는 낙으로 살았던 시기였다. ‘농민신문’이 내게 작가의 길을 열어 준 것이다.

그 후, ‘농민신문’에 ‘박래녀의 농촌일기’, 나중에는 ‘세상사는 이야기’ 코너에 몇년간 연재했다. 매달 2편의 수필이 고정으로 실렸다. ‘전원생활’ 잡지에도 고정 수필가로 2년여간 수필을 실었다. ‘새농민’에도 소개됐다. 그 덕에 원고료는 내 고단한 삶에 윤활유가 돼줬다.

# 국가 공식 노인이 된 촌부의 삶

2024년, 나는 국가 공식 노인이고 결혼 40주년을 바라본다. 여전히 산골에서 촌부로 살며 글을 쓴다. 단감농사 조금과 텃밭농사만 짓는다. 이제 농사도 힘에 부친다. 남편은 지금도 “당신 어디 가서 농사짓는다고 말하지 마라”며 핀잔을 준다.

“서당 개 3년이면 풍월도 읊는다고 했소. 농사꾼 아낙으로 강산이 몇번이나 바뀌었는데. 나도 풍월쯤은 읊고도 남죠.”

그런다고 배운 도둑질이 어디 가지 않는다. 나는 촌부다. 마당가 자투리땅에 심은 하지 감자를 거두면서 기염을 토하고, 원추리 꽃대에 진드기가 가득 고여 있어도 툭툭 털어주며 “야들아, 적당히 빨아먹어. 그래야 꽃도 살지”라면서 텃밭의 풀을 뽑고, 마당에 난 토끼풀을 뒤지며 행운의 잎을 찾아 책갈피에 끼운다.

박래녀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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