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회 영농·생활 수기 우수작-일반부문] 삶의 언덕을 넘어서다
운영하던 출판사 부도로 빚 짊어져
지역신문으로 재기 노렸지만 허사
병원비 탓 남편 수술시기 놓치기도
유기농 농사, 시련 이겨낼 발판 돼줘
비가 온다. 장마의 시작을 알리는 비다.
옥수수가 목이 마른 듯 바짝바짝 내 목을 태우듯 몸을 비틀고 있었는데 다행이다. 아니 아직 못 캔 감자를 생각하니 조금 뒤에 장마가 시작되었으면 하는 생각을 하다 접었다.
농사는 하늘이 지어준다고 하지 않았는가. 창을 타고 내리는 빗물을 바라보며 처음 농사라는 것을 시작했던 때가 빗물을 타고 어스름하게 떠오른다.
1997년 가을 7년간 하던 출판사가 부도났다. 4억원이란 빛을 남긴 채 그동안 수많은 책자와 포스터, 각 학교 교지 등을 찍어왔던 기계들이 멈추었다. 그동안 믿어주며 밀어주던 친정 식구들 얼굴들이 하나둘 스쳐 갔다. 공직에 있던 언니, 동생은 아무런 조건 없이 대출에 도장을 찍어주었다. 본인이 떠안을 빚이 얼마인지도 몰랐다.
그때 둘째 언니, 형부가 찾아오셨다. 은행을 돌며 빚을 청산해 주셨다. 살면서 갚아라. 큰언니는 명예퇴직을 선택했다. 내게 대출해 준 돈의 이자를 감당할 수 없어서 23년의 공직 생활을 접었다. 살면서 갚게 될 줄 알았다. 이십여 년이 지난 지금도 못 갚고 있다. 언니와 형부는 지금도 열심히 살아주어서 고맙다. 그게 빚을 갚은 거야 하신다. 내색하지 않는 언니들을 보면 목에 걸린 가시처럼 아파온다. 언젠가는 살아갈 희망을 준 언니와 형부에게 조금이라도 은혜를 갚고 싶다. 하지만 생각일 뿐 그게 언제가 될는지….
생활은 막막했다. 신랑은 다시 일어나려고 조그만 지역신문을 만들어 재기를 노렸지만 허사였다. 한 끼 한 끼 걱정이 하루하루 늘어갔다. 우리만 있으면 굶어도 되겠지만 아이들은, 아이들은…. 막막했다. 그저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었다. 죽음의 어둠이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후배가 작은 방을 내어주었다.
“형수님, 힘들더라도 한번 같이 잘 지내봐요.”
방은 아주 작았다. 바닥에 네모나게 세면대가 만들어져 있었다. 잠결에 손을 뻗으면 바닥에 있는 세면대에 손이 닿았던 차가운 느낌이 우리의 처절한 삶의 기억처럼 남아 있다. 작은 원룸이었지만 삶의 시작이자 불씨가 되어 신랑은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고물을 주워서 팔아 돈을 가져왔다.
크리스마스이브에 고물 판 돈으로 아이들 선물을 부도난 이후 처음으로 작은 창문에 매달린 양말에 넣었다. 우리 둘은 한없이 울고 또 울었다. 희망이 있을까? 아이들 자는 모습을 보며 새벽 동이 떠오를 때까지 울고 또 울었다. 봄이 오자 신랑은 다시 고물을 주우러 다녔다. 어느 날 다리를 절룩이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아킬레스건 쪽이 심하게 베어져 있었다. 다친 지 며칠은 지난 듯했다. 상처가 벌어져 보기만 해도 소름이 돋았다.
병원에 가자고 했다. 신랑은 “돈도 없는데 수술하면 병원비가 많이 나올 거야, 괜찮을 거야” 하며 돌아누웠다. 무조건 신랑을 끌고 병원으로 향했다. 다행히 신랑 친구가 그곳에 정형외과 의사였다. 그 친구는 마취실로 나를 불렀다. 두부 잘리듯 잘려 쩍 벌어진 상처를 보여주면서 힘줄이 12개가 잘렸고 오래 지나 힘줄을 서로 잡아주는 수술을 해야 하는데 다리를 절 수도 있을 거라며 왜 일찍 안 왔냐고 화를 벌컥 냈다. 차마 병원비 때문이라는 말을 못 했다. 수술은 잘 끝났다. 수술비 낼 돈이 없었다. 어디 전화할 곳도 없었다. 우리의 부도 때문에 친한 지인들도 피해를 보아 어디에도 연락할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남편 친구에게 전화했다.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렸다. 목이 메어 말도 제대로 못 한 것 같다. 친구는 한달음에 달려와 병원비를 계산해 주었다. 아직도 그 친구는 남편의 좋은 친구로 남아 있다.
빗소리는 점점 커지고 바람을 더한다. 지난 생각들을 고개 저어 떨쳐 버린다. 창고에서 이번에 수확한 감자들을 정리한다. 실하다. 5년 전 귀농한 큰딸이 스마트스토어를 열어 감자를 판매한다. 팔릴 때마다 수확한 양파 몇 알, 고추 몇 개, 당근 몇 개를 작은 봉투에 담아 편지를 쓴다. 그날 있었던 농사일을 적고 ‘건강하시고 행복한 날 되세요. 농부부 올림 (웃음 이모티콘)’ 메시지와 함께 밭으로 나가 작은 꽃을 꺾어 함께 넣어 진심을 담아 보내드린다. 유기농 농사를 시작한 지 십여년이 훌쩍 지났다.
이곳저곳을 이사 다녔다. 큰딸이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시내에 있는 학교였다. 매주 준비물 살 돈을 만들 수가 없었다.
“옛날에 봉사활동 갔던 곳인데 시골이야. 그곳으로 가자.”
그 말을 들었을 때 다른 희망이 없었다. 자포자기한 상태였다.
“그래, 한번 가보자.”
남아 있던 작은 경차에 올랐다. 굽이굽이 이런 곳이 있었나. 산 하나를 겨우 넘었다. 산 아래 숲길을 한참이나 내려가니 동네가 보인다. 고갯길을 넘어올 때 창 안으로 따사로운 온기가 위로하듯 스친다. 그때의 그 느낌 기운이 뭔가 모르게 차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듯했다. 지금도 산 아래 내려갈 때마다 그때의 기억을 더듬곤 한다. 그래 이곳이다. 이곳에서 살자. 작은 농가 하나를 구했다. 우리의 삶의 시작이다. 이곳으로 살 곳을 정했다.
신랑은 처음에 유기농 농사를 시작한다고 했다. 고개를 끄덕였다.
비닐 멀칭도 안 한다고 했다. 또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열심히 해봅시다.”
희망찼다. 뜨거운 무엇인가 올라왔다. 운명처럼 느껴졌다. 힘듦을 내려놓고 아이들과 행복한 날만 우리 앞에 있는 듯했다. 주위에 부탁해서 밭을 얻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세 배가 넘는 도지였다. 시골 텃세의 시작이었다. 몰랐다. 다 내 맘처럼 서로 따뜻한 맘으로 살면 되겠지 했지만 이틀 걸러 눈물을 달고 살았다. 밭에 자라는 명아주처럼 여리디 여린 새싹이 튼튼한 지팡이를 만드는 멋진 나무가 되듯 강하고, 강해져야 했다.
풀 속에서 농작물을 키우는 것을 동네 분들은 가만두지 않았다. 밭에 풀 한 포기 보이는 것도 싹싹 뽑아 버리는 동네 분들에게 유기농은 게으른 농부의 모습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나 보다. 몇 년 동안 수많은 분이 지나가시면서 제일 많이 하신 말씀이 “풀 좀 뽑아라”였다. 십여년이 지난 지금 동네 분들이 가장 많이 하시는 말씀.
“요번 감자 농사는 자네 것이 가장 잘 지은 듯하네. 신기하구먼. 풀 속에서도 잘 자라는 것 보니, 허허.”
5년 전 큰딸과 사위가 내려왔다. 큰딸은 농사를 함께 짓고 있다. 아빠랑은 서로 이견이 많아 투닥투닥 다툼이 잦다. 공부하면서 농사를 지어야 한다는 딸과 경험에서 모든 것이 시작된다며 하루가 멀게 싸우고 화해하고, 싸우고 화해하기를 자그마치 5년이 흘렀다. 다툼의 크기는 점점 줄어들지만 아마도 함께하는 동안은 쭈욱 지속될 것 같다. 하지만 그 다툼이 서로 농사를 잘 지어보자 하는 것이니 이 또한 서로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엄마 아빠 나이 들어 힘들다고 씨앗 파종기, 작은 관리기, 고추세척기 등 하나둘 구입한 기계들 덕에 한해 한해 나이 먹음에 기계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 이 또한 귀농한 딸 덕이다. 우리 동네도 젊은이들을 보기 힘들다. 노인정에서 식사라도 할 양이면 주방에 모두 허리 굽은 어르신들이 음식하랴, 설거지하랴 바쁘시다. 이럴 때 딸이 등장해 왔다 갔다만 해도 그저 어른들의 입가에 웃음이 맴돈다.
우리 삶의 뒷덜미를 잡아대던 주변 지인들의 빚들을 청산했다. 울음이 배어 나왔다. 가족들이 모일 수 있는 작은 집도 마련했다. 털털거리던 트럭도 새것으로 바꾸었다. 누구에게는 작은 것이지만 우리에겐 한없이 큰 행복한 날들이다. 한해 한해 지날수록 수확물들이 늘어나고, 한살림에도 계약재배를 한다. 농사를 아무리 잘 지어도 팔지 못했던 그 시절 지금은 오히려 양이 부족하다. 행복한 고민이다. 두 딸은 가정을 일구었다. 힘들게 지낸 세월이 그들을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
파릇파릇 귀여운 들깨 모종이 마당에 가득하다. 장마 중간중간 잠깐 비가 멈추면 옥수수밭 둔덕에, 조금이라도 비어 보이는 곳에 서너 개 잡아 심어준다. 들기름의 짙지 않지만 은은한 고소함에 벌써 입 안에 침이 고인다.
빗물이 수확을 앞둔 옥수수 잎으로, 아직 끈을 한 번만 매어 아슬아슬 휘청이는 고추로, 아직 캐지 못한 두 고랑 남은 감자밭으로, 헛 골마다 빽빽하게 자란 풀들 틈 속으로 스며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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