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로드웨이에 온 듯… 한국서 맞붙는 토니상 뮤지컬들
굳이 뉴욕 브로드웨이까지 날아가지 않아도 좋다. 지금 우리 극장은 작품성과 대중성을 함께 인정받은 미국의 ‘공연계 오스카’ 토니상 수상 대작 뮤지컬들로 북적인다. 세계 최고 수준으로 인정받는 우리 창작진과 배우들이 빚어낸 화려한 무대는 덤이다. 13일 현재 우리 극장에 공연 중인 주요 라이선스 뮤지컬들이 받은 토니상 숫자는 총 18개. 토니 8관왕 ‘하데스타운’, 6관왕 ‘시카고’, 4관왕 ‘젠틀맨스 가이드: 사랑과 살인 편’이 맞붙고 있다. 내달 7일엔 토니 6관왕 ‘킹키부츠’도 초호화 캐스팅 10주년 기념 공연을 개막한다. ‘토니상 뮤지컬 대전’이라 할 만하다.
◇세계 4대 韓뮤지컬 시장… 대작 풍년
공연계에선 지난해 티켓 매출만 5000억원에 육박한 한국 뮤지컬 시장을 미국과 영국, 일본에 이어 세계에서 넷째로 큰 시장으로 본다. 시장이 크고 관객이 열정적인 만큼 뮤지컬 본산인 뉴욕 브로드웨이와 런던 웨스트엔드에서 인정받은 대작 뮤지컬들도 해외 투어나 라이선스 공연 때 늘 우선순위에 놓고 한국 시장 문을 노크한다. 영국 로런스올리비에상을 7개, 미국 토니상을 5개 받은 로열셰익스피어컴퍼니의 뮤지컬 ‘마틸다’나 토니상 10관왕 ‘물랑루즈!’처럼 유럽이나 일본이 아닌 한국에서 최초로 현지 언어 라이선스 공연을 하는 경우도 이젠 낯설지 않다.
◇클래스가 다르다 ‘하데스타운’
‘넌 또 출근해, 또 출근해, 퇴근은 없어….’ 마녀들이 부르는 이 복장 터지게 애절한 노래 속에, 지옥의 왕 하데스가 지배하는 하데스타운의 사람들은 고향도 잊고 이름도 잊은 채 고된 노동의 춤을 춘다. 올여름 가장 주목받는 토니상 수상 뮤지컬은 21세기의 새로운 고전이 될 ‘하데스타운’. 그리스 신화의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 이야기를 뉴올리언스풍의 재즈와 포크 록에 실어 대공황기를 연상시키는 스팀펑크 분위기의 현대적 서사로 재해석했다. 초연부터 “완벽하게 천국 같은 작품”(버라이어티)이자 “현대의 우화가 된 그리스 신화”(가디언)로 극찬받았고, 브로드웨이에서 벌써 1억8900만달러(약 2600억원) 매출을 올렸다. 우리나라에선 코로나 팬데믹 와중이던 2021년 초연에 이어 서울 샤롯데씨어터에서 라이선스 재연이 진행 중이다.
관객을 사로잡는 힘의 요체는 신화를 지금 우리 이야기로 다시 풀어낸 동시대성일 것이다. 예술가 오르페우스(조형균·박강현·김민석)는 가혹한 겨울을 보내고 봄을 불러올 노래를 완성하려 발버둥치느라 자신을 애타게 부르는 연인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에우리디케(김수하·김환희)는 배고픔과 외로움을 견디다 못해 하데스가 내민 ‘노예 계약서’에 서명한다. 젊은이들 앞에 펼쳐진 세상이 황량하고 신산한 것은 신화 속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내 것’ 지키려 장벽 쌓는 세계
고된 불황기를 연상시키는 지상 세계는 자유로운 대신 춥고 배고프고, 하데스타운에선 허기를 채우기 위해 하데스에게 영혼을 팔아버린 인간들이 녹슨 기계를 돌리며 장벽을 쌓아 올린다. 이 설정은 이민을 막기 위해 국경 장벽을 쌓았던 트럼프 시대의 미국 사회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 뮤지컬은 배우·음악·무대장치 등 무대 위 모든 것이 우아하게 세공된 톱니바퀴처럼 쉬지 않고 움직이며, 그 전체가 어우러져 하나의 거대한 그림을 이룬다. 비록 끝이 정해져 있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꿈과 사랑, 더 아름다운 세상을 위해 지옥 끝까지라도 가보는 것이 젊음. 신화의 결말을 알면서도 무대 위 젊은이들은 다시 처음부터 노래를 시작한다. 여배우 최정원이 최재림, 강홍석과 함께 극의 안내자인 헤르메스 역을 맡아 성별 벽을 허문 캐스팅도 화제다. 10월 6일까지, 8만~17만원.
◇눈물 나게 웃긴 ‘젠틀맨스 가이드’
하데스타운이 본격 문학이라면, ‘젠틀맨스 가이드: 사랑과 살인 편’은 부담없이 깔깔 웃으며 볼 수 있는 주말 심야 코미디 영화 같다. 20세기 초 영국 런던, 가난한 청년 ‘몬티 나바로’(송원근·김범·손우현)는 어머니의 죽음 뒤 자신이 고귀한 귀족 다이스퀴스 가문의 여덟 번째 후계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야기는 백작 작위와 가문의 재산을 차지하기 위해 자신보다 서열이 높은 후계자들을 한 명씩 제거하는 과정을 상류사회의 가식과 허영을 꼬집는 블랙 유머, 어디로 튈지 모르는 예측 불가한 구성으로 코믹하게 그려나간다.
이 뮤지컬의 진짜 볼거리는 몬티 나바로의 살인 행각에 차례로 우스꽝스러운 죽음을 맞이하는 귀족 가문의 후계자들을 포함해 1인9역을 연기하는 ‘다이스퀴스’(정상훈·정문성·이규형·안세하)의 대활약이다. 성직자, 동성애자, 은행장, 백작 등 남자뿐 아니라 중년 여성들까지, 수십 초 사이에 옷을 바꿔 입고 분장을 고치곤 다시 무대에 올라 온몸을 내던지며 관객을 웃긴다. 다이스퀴스 역에 캐스팅된 정상훈은 국내 OTT의 코미디 시리즈 ‘SNL’로 이름을 알린 희극 배우. 그는 언론 공개 시연회에서 “이 작품엔 어디 견줘도 손색없는 음악이 있고, 다른 작품에 없는 코미디가 있다. 파격적인 소재에도 극본이 아름답고 군더더기가 없는, 총천연색을 모두 모아놓은 것 같은 뮤지컬”이라고 했다. 광림아트센터 BBCH홀에서 10월 20일까지, 6만~15만원.
◇전석 매진 행렬 ‘시카고’
예매 사이트에서 뮤지컬 ‘시카고’를 열면 가장 먼저 ‘티켓 판매 사기 주의’ 공지가 뜬다. 돈이 있어도 표를 구할 수 없을 지경인 이 뮤지컬의 놀라운 인기의 방증. ‘시카고’ 역시 1997년 토니상 6관왕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2000년 초연 이후 이번 17번째 시즌까지 누적 공연 1500회, 관객 154만명을 넘어섰다. 미워할 수 없는 두 여주인공 ‘벨마 켈리’와 ‘록시 하트’ 역에 각각 최정원·윤공주·정선아와 아이비·티파니·민경아가, 변호사 ‘빌리 플린’ 역에 박건형·최재림이 열연 중이다. 디큐브링크아트센터에서 9월 29일까지, 8만~16만원.
이 밖에도 토니상 뮤지컬은 한 해 내내 우리 극장 무대에 오르고 있다. 봄엔 토니 3관왕 ‘넥스트 투 노멀’, 2관왕 ‘그레이트 코멧’, 5관왕 ‘디어 에반 핸슨’이 공연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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