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현장을 가다/이상훈]‘시라후 세대’ 붙잡는 무알코올 맥주… 15년만에 일본서 시장 7배 커져
2009년 1억6500만 병에서… 올해 10억 병 이상 판매 기대
대형 마트 매대 술과 나란히 배치… 대형 주류사, 신상품 쏟아내며 경쟁
파리 올림픽 공식 맥주도 무알코올… F1 경기 스폰서로도 시장 공략
● 기존 맥주 반값, 술집에서도 무알코올
12일 오후 일본 도쿄 시나가와구의 한 대형 할인점. 매장 한쪽에 아사히와 기린, 산토리, 삿포로 등이 내놓은 수십 종류의 맥주가 쌓여 있었다. 최근 한국에서도 인기 높은 하이볼(위스키에 탄산수를 섞은 술), 추하이(과즙 함유 탄산성 술) 등도 나란히 자리했다.
맥주 매대 맞은편에는 ‘알코올 0%’를 전면에 쓴 무알코올 맥주가 가득했다. ‘아사히 제로’ ‘기린 그린스 프리’ ‘산토리 올프리’ 등 무알코올 맥주만 10종이 넘었다.
매대를 한참 지켜보던 70대 남성은 고민 끝에 캔 6개들이 무알코올 맥주 1팩을 집어 들었다. 그는 “젊었을 때는 맥주를 즐겼지만, 요즘은 한 잔만 마셔도 머리가 아프다”며 “무알코올 맥주는 그런 걱정이 없으니 자주 즐긴다”고 말했다.
무알코올 주류는 맥주가 전부가 아니다. 최근 하이볼이나 소주 칵테일은 물론이고 와인까지 종류별로 무알코올 술이 나왔다. ‘알코올 0.00%’라는 겉면 표시만 없으면 영락없는 술이다.
가격도 저렴하다. 대형 마트에서 맥주는 캔 6개들이 기준 1000∼1200엔(약 9300∼1만1200원)이지만, 무알코올 맥주는 600엔 안팎으로 50∼60% 수준이다. 과거에는 맥주와 맛이 사뭇 달라 꺼리는 이들이 많았지만, 요즘은 알코올이 들어간 맥주와 거의 비슷한 맛을 지닌 제품들이 등장해 인기를 끌고 있다.
일반 술집에서도 무알코올 술은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일본 직장인의 성지로 여겨지는 도쿄 신바시의 한 주점에서도 무알코올 술을 즐기는 이들이 적잖다. 이달 초 한 주점에서 회식 중인 직장인 4명을 만났다. 밝은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던 이들은 “건배”를 외치며 술잔을 부딪쳤다. 4명 중 2명은 ‘진짜 맥주’를, 나머지 2명은 무알코올 맥주를 즐겼다. 무알코올을 선택한 30대 남성은 “술은 못 마시지만, 술자리 분위기는 좋아한다”며 “콜라나 사이다는 어색하지만, 무알코올 맥주는 누가 봐도 맥주 같아 분위기를 맞추고 함께 즐기는 데 제격”이라고 말했다.
무알코올 술의 인기는 일본에 국한되지 않는다. 올림픽 마케팅 상품으로 등장할 만큼 세계적으로 흥행몰이 중이다. 올해 1월 월드와이드 올림픽 파트너사가 된 벨기에 맥주회사 안호이저부시 인베브는 ‘2024 파리 올림픽’ 공식 맥주로 무알코올 맥주인 ‘코로나 세로(Corona Cero)’를 선정했다. 미셸 두케리스 안호이저부시 인베브 최고경영자(CEO)는 “맥주와 스포츠는 궁합이 맞는다. 최근 급성장하고 있는 코로나 세로가 흐름을 선도하고 있다”며 적극적인 제품 홍보에 나섰다.
네덜란드 하이네켄도 ‘하이네켄 0.0’을 한국을 포함해 전 세계에서 판매하고 있다. 하이네켄은 술과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포뮬러1(F1) 스폰서까지 맡으며 적극적인 시장 공략에 나서고 있다. 특히 도수가 0%이니 맥주처럼 즐겨도 음주 운전을 피할 수 있다는 점을 적극 홍보할 수 있다. 일본 맥주업계가 음주 운전 처벌 강화에 대응하고자 무알코올 맥주를 2009년 처음 출시했던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독일 시장조사기관 스태티스타에 따르면 2020년 231억 달러(약 31조6800억 원) 규모였던 세계 무알코올 맥주 시장은 2028년 512억 달러에 이르며 2배 이상으로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맥주의 나라 독일에서도 무알코올 맥주가 맥주 시장의 8%를 차지할 정도여서 향후 성장 가능성이 높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일본은 2009년 도수 0% 맥주가 처음 등장했다. 2007년 도로교통법 개정으로 음주 운전 처벌이 강해지면서 음주 운전자는 물론이고 동승자와 술 판매자까지 처벌할 수 있게 됐다. 이런 분위기에 맞춰 맥주회사 기린이 처음 무알코올 맥주 ‘기린 프리’를 출시한 것. 세계 최초라며 대대적으로 홍보한 이 제품이 인기를 끌자 다른 회사들이 비슷한 제품을 잇달아 출시하며 새로운 시장이 열렸다.
● 술 꺼리는 젊은층 ‘시라후 세대’ 공략
일본 무알코올 주류 시장의 확대는 술 시장 축소 분위기와 맞물려 하나의 사회적 현상으로도 설명할 수 있다. 일본 국세청에 따르면 성인 1명당 술 소비량은 1995년 100L에서 2020년 75L로 25%가량 감소했다. 더 이상 술을 즐기지 않고 술에 취하는 것도 꺼리는 젊은이들을 일본에선 ‘시라후 세대’라 부른다. 시라후는 ‘술을 마시지 않은’ ‘맨정신’이라는 뜻의 일본어다.
일본의 ‘알코올 프리’ 문화를 보여주는 신조어는 이에 그치지 않는다. 알코올을 떠나 멀리한다는 ‘알코올 바나레(アルコ―ル離れ)’나 술을 못 마시는 사람을 뜻하는 ‘게코(ゲコ)’를 타깃으로 시장이 형성된다는 뜻의 ‘게코노믹스’라는 말도 있다. 과거 한국 못지않게 술 없으면 사회생활이 어려웠던 문화는 이제 찾아보기 어렵다. 술을 못 마시는 사람을 비주류나 부적응자로 손가락질하던 분위기도 갈수록 사라지고 있다.
일본 술 시장의 축소를 이끈 저출산 고령화가 무알코올 주류 시장에 영향을 끼친다는 분석도 나온다. 2020년대 들어 과거와 같은 폭발적 성장세가 주춤해졌지만, 제품 품질을 높이고 예민한 소비자 입맛에 맞춘 신제품이 잇달아 출시되며 다시 분위기를 타고 있다.
아사히맥주가 올해 4월 출시한 ‘아사히 제로’는 올해 목표로 했던 1200만 병 판매 목표를 3개월 만에 달성했다. 이에 연말까지 판매 목표를 2배로 늘렸고 생산 설비도 확충했다. “2배로 진한 맥주를 만든 뒤 알코올을 제거하는 공정을 반복해 맥주와 최대한 가까운 맛을 낸 게 인기 비결”이라고 회사 측은 밝혔다.
기린은 ‘라임 과즙이 들어간 0% 맥주 맛 음료’라는 제품으로 기존 맥주와 차별화된 맛으로 승부하고 있다. 산토리는 내장 지방을 줄이는 성분을 넣었다며 ‘몸을 생각한다’는 개념으로 소비자 공략에 나섰다.
이상훈 도쿄 특파원 sanghu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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