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석 칼럼]‘압도적 힘에 의한 평화’, 가능한가?
윤석열 정권이 이렇게 빨리 나라를 위험에 빠뜨릴 줄 몰랐다는 탄식이 곳곳에서 흘러나온다. 외교안보 분야에서도 다르지 않다. 무엇보다도 한반도 평화가 무너지는 속도가 어지러울 지경이다. 윤 정권 출범 후 남북 간에는 갈등이 깊어지면서 상호 군사적 충돌을 방지할 시스템마저 붕괴하였으며, 한반도 안보정세의 주요 변수인 중국, 러시아와 한국의 관계는 최악의 상황에 빠졌다.
이처럼 한반도가 급작스럽게 위기로 치달은 한가운데에는 윤 정권이 한반도 평화증진을 위해 국방력 강화와 협상을 병행했던 전통적인 정책 기조 대신에 내세운 ‘압도적 힘에 의한 평화’ 정책이 있다. 윤 대통령은 “진정한 평화”는 “오직 압도적 힘에 의해서만 지켜진다”며 북한에 대한 ‘압도적 힘’을 줄곧 주창해왔다. 그가 이 ‘압도적 힘’을 구체적으로 정의하지 않아서 그 힘이 단순히 국방력을 지칭한 것인지, 아니면 경제, 외교 등 총체적인 국가 능력을 말하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다만 그의 평소 언행으로 보아 ‘압도적 힘에 의한 평화’는 강력한 국방태세(혹은 국가역량)를 갖추어 북한이 겁을 먹어 도발을 중단하고 나아가 우리의 정책에 호응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겠다는 것으로 읽힌다.
그렇다면 한반도에서 ‘압도적 힘에 의한 평화’는 가능한가? 단언컨대 불가능하다. 한반도 현실과 구조가 이를 말해준다. 먼저 남북관계에서 우리의 역량이 아무리 우월해도 그것이 북한을 굴복시킬 만한 ‘압도적 힘’에 이르는 것은 불가능하다. 북한이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으며 재래식 군사력에서도 상대에게 치명적인 타격이 가능한 미사일·드론 등 첨단무기를 우리 못지않게 많이 개발·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금 한반도에는 한·미 동맹의 대칭점에 있는 북·러, 북·중 동맹이 가동하고 있다. 유엔의 경제 제재로 인해 깊어진 북한의 경제난도 최근 북·러 간 포괄적인 경제협력 합의를 계기로 고비를 넘기는 모양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오로지 힘’의 정책으로 북한을 굴복시키거나 붕괴시킬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망상에 가깝다.
사실, 윤 정권이 때마다 ‘압도적 힘’을 외치는 빈도수에 비해, 우리는 그들이 실제 얼마나 노력을 기울였는지 혹은 어떤 성과를 거뒀는지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 반대 경우는 흔하게 접한다. 예컨대, 국방예산만 봐도 윤 정권의 연평균 증가율은 그들이 ‘가짜 평화’의 당사자로 매도해온 문재인 정부의 6.3%에 훨씬 못 미치는 4.3%에 불과하다. 부산 엑스포 유치 참패에서 보듯 외교력도 과거 어느 정권보다 취약하다. 그들은 중국, 러시아와 갈등하면서 통상으로 먹고사는 대한민국의 경제지도도 쪼그라뜨렸다. 구호와 현실의 괴리가 이렇게 크니 허장성세란 말이 나온다.
‘압도적 힘에 의한 평화’를 주장하며 추진한 윤 정부의 정책 결과도 형편없다. 북한은 윤 정권과 갈등하면서 굴복은커녕 핵무기 능력을 더 고도화했으며, 보란 듯이 군비경쟁을 격화시키고 러시아와의 군사동맹을 복원하였다. 남북관계는 ‘이에는 이’의 팃포탯(tit-for-tat) 갈등으로 점철되었다. ‘압도적 힘’의 추구가 결과적으로 한반도의 ‘압도적인 불안정’만 초래했다.
외교에서도 윤 정권은 한·미(혹은 서방)의 ‘압도적 힘’만 믿고 중국과 러시아를 배척하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정책을 지속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국제 역학상 북한이 전쟁을 도발하는 데는 중국과 러시아의 동의가 필수적이었다. 북한의 군사역량이 남한을 압도하던 6·25 남침 때 김일성은 스탈린의 승인과 마오쩌둥의 동의를 얻어 전쟁을 결행하였다. 반면에 월남패망 시기인 1975년 4월 김일성은 중국을 방문하여 ‘유사시 군사력을 동원한 한반도 통일’에 대한 지지를 요구했으나 중국지도부는 이를 거절했다. 이것이 이후 북한의 대남전략 변화에 큰 영향을 미쳤음은 물론이다. 한국이 중·러와 우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한반도 평화증진에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평화는 강력한 국방력과 그에 바탕을 둔 대화와 협상이란 두 개 바퀴가 선순환하며 증진된다. 그러나 윤 대통령은 역대 정부가 공유한 이런 상식적인 정책 방향을 걷어차고 ‘압도적 힘에 의한 평화’라는 한반도 현실과 괴리된 비현실적 주장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내실이 없으면서도 생명이 질긴 것을 보니 북한에 대한 혐오에 기대 유리한 통치환경을 조성키 위해 국민감정을 자극하려는 정치적 수사란 의심마저 든다. 그렇기에 그의 이 허장성세형 농성식 구호가 계속되는 한, 한반도 평화는 그만큼 아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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