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직필] 예산편성의 틀을 바꿔야 한다
2025년 예산안 발표가 임박했다. 지난 3월 예산안 편성지침에서 정부는 “건전재정의 기조를 확립하여 미래세대에 대한 재정의 책임성을 높이는 가운데, 민생과 현장의 수요를 충실히 반영하겠다”고 했다. 현안에 능동적으로 대응하겠지만 확장적으로 예산을 편성하지는 않겠다는 것이다. 정부는 당연히 재정을 건실하게 운용하고 세대 간 조세 부담의 공평성도 고려해야 한다. 그러나 민생경제가 어려운 시기에는 예산을 적극 편성하고, 저출생과 기후위기 등 구조적 문제의 해소를 위해서도 공공투자를 확대해야 한다. 그래야만 성장세가 유지되고 미래세대의 부담도 줄일 수 있다.
하지만 집권 이후 윤석열 정부의 재정정책은 반대 방향으로 나아갔다. 3번의 세법개정안에서 기준연도 대비 5년간 총 81조6000억원에 달하는 감세를 추진했고, 세목별로는 법인세, 소득세, 상속세·증여세, 종합부동산세 등 자산소득에 집중됐다. 특히 2024년 세법개정안의 상속세율 개편에 따른 감세액 중 약 70%가 상위 0.01%(2023년 기준 37명)의 피상속인에게 귀속될 것으로 추산된다. 그야말로 초부자 감세다.
건전재정을 중시하는 정책 기조하에서 대규모 감세는 긴축재정으로 이어져 민생경제를 더욱 어렵게 하고 재정건전성을 위협한다. 감세의 투자 및 고용 유인 효과로 세수 증가를 기대했지만, 2023년 56조4000억원의 세수결손이 발생했고, 예산불용액은 45조7000억원에 달했다. 그 결과 87조원의 관리재정수지 적자가 발생하면서 국가채무도 전년 대비 59조4000억원 증가했다. 기획재정부는 작년에 이어 지난달에도 ‘세수 조기 경보’를 발령했다.
그러면 정부의 기대와 달리 왜 이런 결과가 초래됐는가? 그 이유는 낙수효과에 대한 강한 믿음과 왜곡된 중산층 위기론에 근거한 부자 감세, 기재부에 집중된 예산편성 권한과 선거제도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첫째, 윤 정부는 낙수효과에 기대어 대규모 부자 감세를 추진했지만,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격차와 기업의 소유지배구조, 수출 대기업과 내수산업 간 취약한 연계 구조, 노동시장의 이중구조 등으로 인해 기대했던 효과는 나타나지 않았다. 오히려 2022년 이후 취업자 증가율이 떨어지고 실질임금이 감소하면서 가구실질소득이 하락하고,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 임금 격차가 확대되면서 상하위 소득계층 간 시장소득 격차는 더 크게 벌어졌다.
둘째, 한국개발연구원 황수경 박사의 2023년 연구에 따르면 심리적 비상층(실제로는 중산층이 아닌 상위계층)은 세금과 사회보험료 인상에 따른 ‘중산층 위기’ 담론을 부풀려 그들의 부담을 낮추려는 경향이 있다. 2024년 세법개정안에서 제시된 최상위 자산가 위주의 상속세 개편과 가업상속공제 확대, 금융투자소득세와 최대주주 보유주식 할증평가 제도 폐지 방침 등 기업과 자본에 대한 파격적인 세제지원은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셋째, 참여정부는 재정의 효율적 관리를 위해 총액배분자율편성 예산제도를 도입했지만, 여전히 예산 당국의 통제가 부처의 자율을 제약하고 있다. 우리나라 재정운용체계에서 예산편성은 정부의 고유권한이고, 국회는 정부의 동의 없이 정부가 제출한 지출예산 금액을 증가하거나 새 비목을 설치할 수 없다.
넷째, 다수대표제를 채택한 국가에서 부동표는 주로 소득분포의 중간에 위치하기 때문에 정당은 예산편성에서 중산층의 선호를 중시하지만, 상대적으로 저소득층의 요구에는 덜 주목하는 경향이 있다. 반면 비례대표제에선 저소득층의 표가 곧 의석수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그들의 이해관계는 특정 정당의 지지를 받을 수 있다.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채택한 우리의 선거제도 또한 서민층의 요구가 예산편성에 균형 있게 반영되기 힘든 구조적 한계를 안고 있다.
2025년 예산은 혁신의 생태계를 조성해 성장 동력을 살리고, 분배구조를 개선하는 방향으로 편성해야 한다. 낙수효과가 작동하지 않는 현실에서 감세와 건전재정 기조를 유지할 경우, 민생과 현장의 수요를 예산에 충실히 담아낼 수 없고, 미래세대에 대한 재정 책임을 이행하기도 어렵다. 부자 감세와 긴축재정 기조를 철회해 고용안전망과 사회안전망을 촘촘히 구축하고, 인적자본과 인내자본에 대한 투자를 확대해야 한다.
나아가 서민·중산층의 사회적 요구가 예산에 제대로 반영되기 위해서는 행정부에 편향된 예산편성 권한을 개편해 재정의 ‘정치적 책임성’을 높이고, 선거제도에서 비례대표성의 확대, 국회의 예산 결정 권한 강화, 참여예산제도의 활성화 등으로 재정의 민주적 통제를 강화해야 한다.
강병구 인하대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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