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책하는 피해자에 대한 위로 [박주영의 올라이즈(All ri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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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어떤 양형 이유> <법정의 얼굴들> 의 저자인 박주영 판사가 세상이란 법정의 경위가 되어 숨죽인 채 엎드린 진실과 정의를 향해 외친다. 법정의> 어떤>
"직장에서는 '아직도 안 끝났냐? 이미 벌어진 일, 운다고 해결되는 거 아니다'라는 말을 합니다. 오늘 연차도 못 쓰고 멀리서 소식 들었습니다. 너무 감사드립니다. /살 집은 잘못 만났지만 판사님을 만난 점에서 하늘이 아직 저를 버리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힘들지만 다시 힘내서 살아보겠습니다. /피해자 딸 엄마입니다. 돈은 사라졌지만 법의 심판이 살아 있음에 딸도 저도 희망을 잃지 않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가해자보다 피해자 탓을 하는 사회에서 너무 외로웠습니다. 제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 주는 한마디가 정말 큰 힘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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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어떤 양형 이유> <법정의 얼굴들>의 저자인 박주영 판사가 세상이란 법정의 경위가 되어 숨죽인 채 엎드린 진실과 정의를 향해 외친다. 일동 기립(All rise)!
지난 6월 부산지법은 1심의 형이 너무 높다고 주장한 어떤 피고인의 항소를 기각했다. 그는 원룸 9채 296가구를 '무자본 갭투자' 방식으로 취득했다가 전세사기로 기소됐는데, 피해자는 229명으로 대부분 20, 30대였고 피해액은 180억 원이었다. 피고인이 편취한 보증금 중에는, 그 누구보다 근면한 젊은이들이 생애 처음 받아 보는 은행대출금과 쥐꼬리만 한 월급의 일부와, 자잘한 욕망을 참으며 모은 비상금과, 그들의 부모가 자식의 희망찬 미래를 기원하며 보태준 쌈짓돈이 포함되어 있었다.
1심 공판 내내 피해자들이 재판부에 고통을 호소했지만, 피고인은 끝내 피해를 배상하지 않았다. 검사는 여러 죄를 한 번에 처벌할 경우 형을 가중할 수 있는 규정을 적용하여 징역 13년을 구형했다(형법상 사기죄의 법정 최고형은 징역 10년). 나는 법상 가능한 최고형인 15년을 선고한 후, 축 처진 어깨로 법정을 나서려는 청년들을 잠시 불러 세우고 밤늦도록 작성한 편지를 읽었다. '여러분들 잘못이 아니니 절대 자책하지 말고 힘내 달라'는 내용이었다. 당부가 끝나자 청년들이 여기저기서 훌쩍였고, 법대를 향해 목례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날 저녁 관련 기사에 피해자들이 남긴 댓글의 일부다.
"직장에서는 '아직도 안 끝났냐? 이미 벌어진 일, 운다고 해결되는 거 아니다'라는 말을 합니다. 오늘 연차도 못 쓰고 멀리서 소식 들었습니다. 너무 감사드립니다. /살 집은 잘못 만났지만 판사님을 만난 점에서 하늘이 아직 저를 버리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힘들지만 다시 힘내서 살아보겠습니다. /피해자 딸 엄마입니다. 돈은 사라졌지만 법의 심판이 살아 있음에 딸도 저도 희망을 잃지 않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가해자보다 피해자 탓을 하는 사회에서 너무 외로웠습니다. 제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 주는 한마디가 정말 큰 힘이 됩니다."
댓글을 읽다가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돈 한 푼 받아 주지 못했고, 나 역시 이토록 나쁜 세상을 만드는 데 일조한 기성세대라는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한마디 말에도 선뜻 공명하는 청년들의 순수함에 더욱 마음이 아팠다.
고통으로 신음하는 수많은 범죄 피해자를 보다가 문득, 피해자들은 어쩌면 영원한 환상통(幻想痛·phantom pain, 절단되어 존재하지 않는 신체 부위에서 느끼는 감각)을 겪는 사람들이 아닐까, 생각한 적이 있다. 잘려 나간 팔과 같이 부재한 것에서 실재하는 고통을 느끼니 말이다. 결국 환상통은 상실에서 오는 불치의 통증인 셈이다.
'이미 떨어져 나간 팔이니 빨리 잊어라, 한쪽 팔이라도 지키려면 팔이 잘린 이유를 따져 봐야 한다'와 같이 현실을 냉정하게 직시하라는 말은 피해자에게 별 도움이 못 된다. 불행이 반복되는 것을 막기 위해 원인을 정확히 찾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불행을 극복함에 있어 원인 분석은 큰 효용이 없다. 오히려 불행을 자책하면 빠져나오기가 더 힘들다. 나 역시 갑작스럽게 병을 얻고 여러 검사를 받던 중, 내 나쁜 습관 때문이 아니라 유전적 흠결 때문에 발병했을 가능성도 있다는 소견을 들었을 때 얼마나 마음이 편해지던지.
최근 전세사기를 비롯한 각종 범죄가 극성이다. 피해가 신속히 회복되기를 바라지만, 피해자들이 현실의 장벽을 넘기란 간단치 않다. 피해자를 진정으로 회복불능에 빠뜨리는 최후의 일격은 가해자나 법이 아니라 주변의 싸늘한 시선이다. 당장 회복이 어렵더라도 누군가 피해로 힘들어하면 우선 함께 아파해 주자. 공감과 위로가 새 팔을 돋아나게 한다.
박주영 부장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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