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수 시절 ‘문학의 꿈’ 예순 넘어 일본 문단서 이뤘죠”
일문학자인 김정훈(62) 전남과학대 교수가 시인으로 등단했다. 그것도 한국이 아니라 일본에서. 일본어로 쓴 시를 일본의 유력한 시 전문지에 발표했고 내친 김에 역시 일본어 시집까지 출간했다. 광주의 시인들인 문병란과 김준태의 시집을 일역 출간했고 이육사·윤동주·이상화 등 일제 하 저항 시인들의 시선집 ‘한 개의 별을 노래하자’를 역시 일본에서 펴냈던 그가 창작자로 나선 것이다.
“다키지가 태어난 아키타현에선 2월24일 다키지 제사/ 빛고을 광주에선 나고야 극단 연극 ‘봉선화’/ 시대와 국경 넘어 피눈물이 흐른다/ 나이와 성별 넘어 짙은 탄식이 새 나온다”
김 교수의 시 등단작인 ‘봉선화’의 일부다. 올해 2월24일 광주에서 나고야 시민연극단이 조선인 근로정신대 할머니 문제를 주제로 무대에 올린 연극 ‘봉선화’를 관람하고서 쓴 작품이다. 일본 프롤레타리아 문학을 대표하는 소설 ‘게 가공선’의 작가 고바야시 다키지와 5월 광주, 근로정신대 문제 등을 아우르는 문제의식이 돋보인다.
“관람객들이 한글 자막이 붙은 일본어 연극을 보며 감동해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인상적이었고, 그에 대해 감상문을 쓰고자 했던 것인데 쓰다 보니 시가 되어 나오더군요. 평소 번역을 통해 시 형식에 익숙해져서인지, 그 감상을 시로 표현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겠다는 심정이었어요.”
12일 오후 서울 마포구 공덕동에서 만난 김 교수는 시를 쓰게 된 계기를 이렇게 설명했다. 그 시를 평소 필자로 관계를 맺고 있던 일본의 시 전문지 ‘시와 사상’에 보냈는데 뜻밖의 답변이 돌아왔다. 잡지의 고정란인 ‘나의 시의 원류’에 작품 창작 뒷이야기와 함께 시를 발표하자는 것이었다. 올 3월이었다.
“‘시와 사상’은 1972년에 창간된 일본의 권위 있는 시 전문지입니다. ‘나의 시의 원류’는 보통 중견 시인들이 글을 쓰는 코너인데, 잡지 편집진은 제 시 ‘봉선화’를 발표하는 것을 등단으로 삼겠다고 하더군요. 그 말을 듣자 부담과 책임감이 커졌어요. ‘나의 시의 원류’에 관해 쓰자면 달랑 시 한 편으로는 부족하고 시집 한 권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겠나 생각하게 되었죠.”
그렇게 한달음에 쓴 시 20편을 일본 나고야의 후바이샤 출판사에 보냈고, 시집으로 내자는 답신을 받고 추가로 쓴 시들을 더해 모두 50편이 실린 시집 ‘아들과 함께 보는 ‘서울의 봄’’이 출간되었다. 잡지 발행은 8월1일, 시집 출간일은 8월2일이었다.
조선인 근로정신대 연극 보고 쓴
시 ‘봉선화’로 ‘시와 사상’에 등단
1972년 창간한 권위 있는 문학지
한달음에 50편 더 써 일본어 시집도
“학원 교사 문병란 시인 통해 시 관심
스승 시 번역하며 시심 불타올랐죠
일문학 연구 주제로 시 계속 쓸 터”
“사랑하는 아들아/ 군부 쿠데타 세력과 그걸 저지하려는 군인의 대립으로/ 줄곧 전율과 박력 넘치는 장면이펼쳐지기에/ 그 얘기를 듣고 보려 했는지/ 군부 쿠데타의 배경과 광주항쟁에 대해 더욱 알고 싶어서/ 나를 꾀었는지는 더 이상 묻고 싶지 않다”
시집 표제작인 ‘아들과 함께 보는 ‘서울의 봄’’ 일부다. 일본에서 이달 23일 개봉한다는 영화 ‘서울의 봄’을 계기로 삼아 광주 5·18 당시 재수생으로서 투쟁에 적극 뛰어들지 못했던 자신의 경험을 들려주는 작품이다. 역시 시집에 실린 ‘해협을 건너며’에서는 한-일 교류의 꿈을 안고 일본에 건너가 “심장이 춤추듯 두근거리는 광경을” 목격했던 화자가 한국에 돌아온 뒤 미해결의 한·일 문제에 관한 뉴스를 보며 침묵 속에 냉정해지는 모습을 그렸다. “구름과 바람이여! 안녕/ 오에 겐자부로도 김지하도 없는 세상// 평화가 찾아올 날을 기다리며/ 이젠 안녕!/ 왠지 쓸쓸해져서 견딜 수 없습니다.”
인용한 시들에서 보듯 김 교수의 시는 한·일 교류의 일상에서부터 시작해 민주와 인권, 평화 정신을 공유하고자 하는 주제를 담고 있다. 그리고 그 바탕에는 그가 태어나 자란 광주라는 토양이 있다.
“제가 시에 관해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지게 된 건 광주항쟁이 있던 1980년, 재수생 시절이었습니다. 당시 광주의 학원에 다녔는데 그때 담임이 시인인 문병란 선생님이었어요. 이육사의 ‘절정’이나 한용운의 ‘님의 침묵’ 같은 시에 대해 열변을 토하는 선생님의 강의를 통해 역사와 현실에 대해 그리고 그것들과 문학의 관계에 대해 배울 수 있었죠.”
그렇지만 그 경험이 시 창작으로 바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일문학 전공으로 일본 유학을 다녀온 뒤 문병란 시인과 재회하고 그의 시집을 일본어로 번역 출간하면서 그는 시를 다시 만났다. 일본 주오대 히로오카 모리호 교수와 문병란 시집을 공역했고, 역시 광주의 시인 김준태 시집은 혼자서 번역 출간했다. 일제강점기 일본의 양심적인 문인 마쓰다 도키코에 관한 책을 번역하고 직접 쓰기도 했다. 그렇게 시를 번역하다 보니 재수생 시절 이후 오래 잊고 있던 시심이 다시 불타올랐다.
“시를 번역하는 일은 그 무엇보다 충실한 필사이자 창작의 연찬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문학 연구자가 연구의 연장에서 평론을 쓰는 것처럼, 연구자로서 쓰는 시도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한-일 문화 교류의 올바른 정립, 권력에 맞선 한·중·일의 시민 정신 같은 제 연구 주제를 시로 쓰는 일은 앞으로도 계속 할 생각입니다.”
한편 김 교수의 등단작이 실린 ‘시와 사상’ 8월호는 ‘윤동주의 시가 있는 거리에서’를 특집으로 삼았다. 윤동주 연구자인 우에노 준 교토예술대학 객원교수가 윤동주의 시를 편역하고 해설을 썼으며, 릿쿄대학 이문화커뮤니케이션학부 이향진 교수, ‘시인 윤동주를 기념하는 릿쿄의 회’ 야나기하라 야스코 대표, 윤동주 추모회 박희균 회장 등 14명이 평론을 실었다.
“시인으로 등단했으니 앞으로 평생 시를 쓴다기보다는 제 연구 주제를 시 형식으로 표현한다는 생각”이라는 김 교수는 그럼에도 산을 오르면서 떠오르는 시에 관한 착상을 꾸준히 휴대전화에 메모해 두고 있노라고 밝혔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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