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훈 "한 작품서 9개 캐릭터 연기…10초 안에 관객 설득해야"
"웃음은 아픈 사람도 일으켜…제가 코미디 사랑하는 이유죠"
(서울=연합뉴스) 오보람 기자 = 서울 광림아트센터 BBCH홀에서 공연하고 있는 '젠틀맨스 가이드: 사랑과 살인편'은 뮤지컬에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블랙코미디 장르다.
20세기 영국 런던에 사는 가난한 청년 몬티 나바로가 귀족 '다이스퀴스' 가문의 핏줄이라는 것을 알고서 백작 자리에 오르기 위해 자신보다 높은 서열의 후계자를 하나씩 제거해 나가는 이야기다. 살인이 소재지만, 상상 초월의 살해 방법과 유머로 웃음을 유발한다.
웃음의 지분을 가장 많이 차지하는 건 몬티에게 살해당하는 9명의 다이스퀴스다. 배우 한 명이 9가지 캐릭터를 맡아 각기 다른 매력으로 웃음을 안긴다.
"제가 나왔을 때 관객이 '아!' 해야 해요. 직설적인 방법으로 내가 연기하는 게 누군지 보여주는 거지요. 설명할 시간이 없어요. 10초 안에 관객들을 설득해야만 합니다."
13일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만난 다이스퀴스 역의 정상훈은 9개 캐릭터를 소화하는 비결을 묻는 말에 이렇게 답했다.
그는 "각 인물의 키나 자세를 모두 다르게 하고 목소리도 바꾼다"면서 "공연하면 할수록 아예 다른 사람처럼 보이고 싶다는 욕심이 자꾸 생긴다"고 했다.
"제일 뒤쪽에 앉은 관객들은 제 얼굴이 안 보이잖아요. 그래도 제가 뭘 하고 있는지 확연히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대극장에서 공연하는 배우들은 그걸 절대 잊으면 안 돼요. 몸으로 스토리와 감정을 표현해야 합니다."
다이스퀴스 역의 성패는 이른바 '퀵 체인지'(quick change)에 달렸다. 한 캐릭터를 연기하고 퇴장한 후 무대 뒤에서 다른 캐릭터로 재빨리 분장해야 한다는 의미다. 최대 15초를 넘기지 않아야 극이 자연스럽게 전개될 수 있다.
정상훈은 "처음엔 땀 때문에 옷을 갈아입는 데만 5∼6초를 빼앗겼다"면서 "이젠 토시를 끼고 공연하면 시간이 단축된다는 노하우도 생겼다"며 웃었다.
그러나 가발·수염 부착, 의상 착용, 화장 등을 한꺼번에 하다 보니 가끔은 완벽하게 변신하는 데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정상훈은 애드리브로 관객에게 웃음을 줘 위기를 모면한다고 했다.
"한 번은 옷을 갈아입다 늦어져서 정해진 시간 안에 무대에 못 나갔을 때가 있었어요. 동물적으로 '계단으로 올라오느라 늦었다'고 했지요. 립스틱을 못 지우고 무대에 섰을 땐 '체리가 너무 맛있더라'라고 했고요. 그렇게 넘어가긴 하지만, 되도록 지양하고 있어요. 관객들 눈높이가 높아져서 이렇게 빠져나간다는 걸 아시거든요, 하하."
정상훈이 다이스퀴스로 분하는 건 이번이 두 번째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한창이던 2020년 재연 무대에 섰고, 네 번째로 열리는 올해 공연에 다시 합류했다.
"지난 공연 때는 코로나19 때문에 관객들이 마스크를 쓰고 계셨어요. 그런데도 비말이 튀기 때문에 큰소리로 웃는 걸 자제하고 손뼉만 쳐야 한다는 거예요. 연습을 많이 했는데 너무 안타깝더라고요."
아쉬운 마음이 컸던 그는 사연의 출연 제안을 받고서 "무조건 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뮤지컬은 물론 드라마와 영화, 연극, 예능 프로그램 등 폭넓은 활동 반경을 자랑하는 정상훈은 특히 코미디에 일가견 있다. 'SNL 코리아'에서는 코미디언을 능가하는 끼를 보여주기도 했다.
정상훈은 그러나 "웃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안에는 페이소스(감정에 호소하는 것)가 있어야 한다"면서 "그래서 코미디가 힘들기도 하다"고 했다.
"웃음은 아픈 사람도 일으킨다고 생각해요. 웃는 사람이 많아야 건강한 사회고, 우리 사회가 그런 데면 좋겠어요. 제가 코미디를 사랑하는 이유도 바로 그거예요.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잖아요. 어제 제 공연을 보고서 오늘 출근길 지하철에서 한두 번 킥킥 웃으실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저는 제 몫을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너무 감사한 일이지요."
ramb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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