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임신중지’ 범죄화에만 몰두…정작 ‘여성 건강권’은 방치

오세진 기자 2024. 8. 13.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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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36주차까지 지연됐는지 외면”
관련법 개정 논의 미비 지적 잇따라
‘모두의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권리보장 네트워크’ 주최로 지난해 4월 9일 서울 용산역 광장에서 열린 집회에서 참석자들이 ‘임신중지는 건강권’, ‘유산유도제 도입하라’는 문구가 적힌 머리띠를 착용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지금 우리 사회가 보다 중요하게 질문해야 할 것은 살인죄 성립 여부가 아니라, 왜 ‘낙태죄’ 폐지 이후에도 이전과 다름 없이 늦은 시기에 임신중지가 진행됐는지, 임신 36주차에 임신중지 결정을 내리기 이전에 이 여성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에 관한 것이다.” (‘모두의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권리 보장 네트워크’ 13일 입장문)

경찰이 보건복지부의 수사 의뢰에 따라 ‘36주차 임신중지’ 유튜브 영상을 올린 여성과 수술을 한 병원장을 살인 혐의로 입건한 가운데, 국가가 ‘36주차에 이르기까지 여성이 왜 임신중지를 못했는가’라는 핵심 문제는 외면한 채 처벌에만 적극적이라는 비판이 이어지고 있다.

헌법재판소가 2019년 4월 형법상 ‘낙태죄’ 조항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한 지 5년여가 넘도록 정부는 건강보험이 적용되는 공식적인 의료 체계에서 안전한 임신중지를 보장하는 법·제도 구축 책임을 방기했다. 국회 역시 낙태죄 조항이 있던 형법이 정리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와 상관없이 할 수 있는 모자보건법 등 관련법 개정에 대한 논의를 진척시키지 않았다.

13일까지 공개된 경찰 수사 내용을 보면, 영상을 게재한 20대 여성은 임신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됐으며 지인이 인터넷 검색으로 알아보는 방식으로 병원을 수소문해 900만원의 비용을 부담하고 수술을 받았다. 경찰이 태아의 아버지를 특정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이러한 임신 후기(28∼40주)에 임신중지를 하는 사례는 흔치 않다. 복지부의 ‘2021년 인공임신중절 실태조사’를 보면 대개 임신 10주차 이내(평균 6.74주)에 임신중지가 시행된다. 임신 주수가 늘어나는 만큼 임신중지 및 출산으로 인한 위험(과다출혈, 포궁 내막 감염, 포궁 천공 등 수술 합병증)은 커진다.

그런데도 후기 임신중지가 발생하는 건 앞선 시기에 의료 접근성이 충분히 보장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게 전문가들 견해다. 이런 까닭에 세계보건기구(WHO)는 안전한 임신중지에 대한 접근을 가로막는 장벽(금지법, 서비스 공급 부족, 높은 비용, 낙인, 의료서비스 공급자의 반대, 불완전한 정보 제공 등)을 철폐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현재 한국에서 임신중지 수술은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아 환자가 비용을 전액 부담해야 한다. 수술 등 비용도 병원마다 천차만별이다. 정부는 안전하게 임신중지를 할 수 있는 병원 정보를 제공하지도 않는다. 세계보건기구가 필수의약품으로 지정해 세계 99개국에서 합법적으로 쓰이고 있는 유산유도제(임신중지약) 사용도 여전히 불법으로 온라인 암시장에서 암암리에 거래된다.

김성이 시민건강연구소 건강형평성연구센터장은 “임신중지가 시급한 여성들은 병원에서 제시하는 부당한 조건, 즉 의료 기록을 남기지 않거나 현금 결제만 가능하도록 하는 위험 등을 떠안고 수술을 받아야 하는 게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산부인과 전문의인 최예훈 색다른의원 원장도 “의학적으로 임신중지는 어떤 주수에 시행하든 출산보다는 안전하다”고 전제한 뒤 “임신중지에 대한 건강보험 적용은 비용 부담 면에서 (필요할) 뿐만 아니라, 의료인들이 임신중지를 의료서비스로 인식해 정보 제공과 상담 체계 구축 등 제도를 만드는 데 필수적인 요소”라고 말했다.

헌법재판소가 임신중지(낙태)를 하는 여성과 의료진을 처벌하도록 한 형법 낙태죄 조항이 헌법에 합치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2019년 4월 11일 헌재 앞에 모인 시민들이 이같은 결정에 환호하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미흡한 의료 접근성은 여성이 여러 가지 사유로 결심한 임신중지를 지연시키고, 이는 다시 건강에 미치는 위험과 비용 부담을 높인다는 국외 연구 결과가 있다. 미국 비영리 연구기관인 구트마허 연구소가 발행한 학술지에 게재된 논문 ‘3분기(임신 26주 이후) 임신 중지는 예외적인가’(2022년)는 임신 24주차 이후 임신중지 수술을 받은 18∼46살 여성 28명을 심층 면접한 결과를 바탕으로 했는데, 연구 참여자들은 임신중지 지연 사유로 비싼 수술비와 임신중지가 가능한 전문의와 의료기관 부재, 의사의 수술 거부 등의 문제가 꼽았다. 앞서 같은 학술지에 게재된 논문 ‘임신중지 치료 장벽과 그 결과’(2017년)는 미국 미시간·뉴멕시코주 내 6개 지역에서 임신중지 수술을 원하는 18살 이상 여성 29명(22명은 저소득층)을 인터뷰했는데, 이들은 수술을 받기 위해 여러 지역을 떠도는 동안 병원 간 수술 비용 차이, 비용 부담 증가 같은 어려움을 마주했다.

결국 36주차 임신중지를 정말 국가가 막고 싶다면 되도록 빠른 시기에 안전하게 임신중지 결정을 할 수 있도록 공식 의료체계 안에서 상담과 지원을 제공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김선혜 이화여대 교수(여성학)는 “임신중지 범죄화(처벌)를 강화할수록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의사들은 위축될 수밖에 없으며, 이는 결과적으로 임신중지 접근성 전반을 더욱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며 “정부가 후기 임신중지를 정말 근절해야 하는 심각한 문제로 여긴다면 임신중지 접근성 강화를 위해 어떤 의료체계를 만들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여성·시민단체 27곳이 참여하고 있는 ‘모두의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권리 보장 네트워크’도 13일 입장문을 통해 “여성이 원치 않는 임신으로 임신중지를 결정했다면 임신 후기까지 지연되지 않고 이른 시기에 안전하게 임신중지를 할 수 있도록 보건의료서비스 및 정보제공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며 “이를 위해 임신 기간과 당사자의 상황, 사회경제적 여건에 따른 명확한 보건의료 지침과 가이드를 마련하고 보건의료기관의 임신중지 서비스 제공 현황을 파악하고 의료기관 간 연계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국제 사회도 이런 내용의 정책 도입을 한국 정부에 거듭 촉구해왔다.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CEDAW)는 “인공인신 중절 비범죄화와 수술한 여성에 대한 처벌 철폐”(2018년), “청소년을 비롯한 여성들의 인공임신중절 및 인공임신중절 이후 서비스 접근권 보장”(2024년)을 권고한 바 있다.

오세진 기자 5sjin@hani.co.kr 최윤아 기자 a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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