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운형의 후예, 이승만의 후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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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10월1일, 몽양 여운형(1886~1947)이 서울 옥인정 47번지에서 '시내 각 신문사' 기자단과 회견에 임했다.
이 광경을 전하는 이튿날치 '매일신보' 기사를 보면, 여운형은 "대체 조선의 독립은 연합군이 우리 조선사람에게 주는 단순한 선물은 아니다. 3천만 조선동포는 과거 36년간 유혈의 투쟁을 계속해왔으므로 혁명에 의하여 오늘날 자주독립을 획득한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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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10월1일, 몽양 여운형(1886~1947)이 서울 옥인정 47번지에서 ‘시내 각 신문사’ 기자단과 회견에 임했다. 이 광경을 전하는 이튿날치 ‘매일신보’ 기사를 보면, 여운형은 “대체 조선의 독립은 연합군이 우리 조선사람에게 주는 단순한 선물은 아니다. 3천만 조선동포는 과거 36년간 유혈의 투쟁을 계속해왔으므로 혁명에 의하여 오늘날 자주독립을 획득한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 스스로 독립을 쟁취했다는 ‘해방의 주체성’을 강조한 것이다.
그로부터 6개월가량 흐른 1946년 3월20일 미·소가 분할 점령한 한반도에 ‘통일된 임시정부’를 세우기 위한 미소공동위원회가 개막했다. 불행히도 동유럽에서 시작된 ‘냉전’이 한반도를 집어삼켰다. 미소공위가 결렬되자 이승만(1875~1965)은 그해 6월3일 그 유명한 ‘정읍 발언’에서 “통일 정부를 고대하나 여의치 않으니, 우리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자고 말했다. 이를 통해 남한 단정의 단초를 열게 되는 이승만은 독립은 연합군의 승리에 의해 주어진 것이라는 ‘해방의 국제성’을 믿는 인물이었다.
해방 이후 지난 79년 동안 대한민국은 ‘해방을 어떻게 이해할 것이냐’를 둘러싸고 살벌한 대립을 이어왔다. 전선의 한쪽엔 주체성을 강조하는 ‘여운형의 후예들’이 있었다. 이들은 해방은 선열들의 피와 땀으로 이뤄낸 것이기에 대한민국임시정부를 기억하려 하고, ‘햇볕정책’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 등을 통해 우리 자신의 힘으로 분단의 굴레를 벗어나려 했다. 이들이 볼 때 대한민국이 자신의 역사에서 단 하루를 기억해야 한다면, 너무 당연히(!) ‘광복절’(1945년 8월15일)이 될 수밖에 없었다.
맞은편엔 ‘이승만의 후예들’이 있었다. 이들은 한국이 험한 국제 질서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세계 정세의 흐름을 잘 읽어야 하고, 한-미 동맹과 한·미·일 3각 협력에 기댈 수밖에 없다고 믿어왔다. 이승만은 분단을 막으려 남북 협상에 나서는 이들에게 “대세에 몽매하다는 조소를 면키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이들에게 의미 있는 단 하루는 이승만이 힘겨운 결단을 해 얻어낸 ‘건국절’(1948년 8월15일)이었다.
윤석열 정부가 ‘뉴라이트 논란’을 빚는 김형석을 독립기념관장으로 임명해 다시 불러낸 광복절·건국절 논쟁은 결국 ‘우리는 누구이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즉 ‘국가 정체성’을 둘러싼 갈등이다. 여운형과 이승만의 후예들이 벌여온 사실상의 ‘내전’인 것이다.
길윤형 논설위원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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