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시 폭락 부른 ‘엔 캐리 청산’…규모도, 파장도 ‘오리무중’
“세계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캐리 트레이드가 청산되면 (투자자) 목 몇 개는 날아갈 것.”(소시에테제네랄 증권)
“엔 캐리 트레이드는 ‘붉은 청어’(red herring·사태의 본질을 흐리는 것)다. 진짜 방아쇠는 미국 경기 연착륙 기대가 경착륙 우려로 돌변한 것.”(노무라 증권)
글로벌 주가 폭락의 충격이 가라앉은 가운데 그 배경으로 지목된 엔 캐리 트레이드 청산을 둘러싼 시장 의견이 분분하다. 폭락의 원인 중 하나라는 데는 이견이 없지만, 뚜렷한 윤곽이 잡히지 않는 엔 캐리 트레이드 자금의 특성 탓에 사태 진단과 전망이 안갯속을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이다.
미국 최대 은행인 제이피모건은 지난 8일(현지시각) “글로벌 엔 캐리 트레이드 자금 중 현물에 투자된 자금이 75%가량 청산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아린담 산딜랴 제이피모건 글로벌 외환(FX)전략부문장이 “투기적 캐리 트레이드의 50~60%가 청산된 것으로 보인다”고 밝힌 지 이틀 만에 다른 추정값을 내놓은 것이다. 앞서 이 은행은 글로벌 엔 캐리 트레이드 자금 규모를 4조달러(약 5000조원)로 추산한 바 있다.
엔 캐리 규모 추산은 기관마다 제각각이다. 유비에스(UBS) 일본법인은 지난 7일 글로벌 엔 캐리 트레이드 자금이 5천억달러에 이르렀다가 최근 2~3주 사이 50%가 청산된 것으로 보인다는 분석을 내놨다. 도이체방크 추산은 무려 20조달러(약 2경7천조원)다. 엔 캐리 자금 규모가 추정 기관에 따라 5천억달러에서 20조달러로 널을 뛰고 있는 셈이다. 국내에서는 13일 조용구 신영증권 애널리스트 등이 “위험자산에 투자했던 자금 위주로 60% 수준 청산이 이뤄진 것으로 판단한다”고 했으나 전체 규모 추산값은 내놓지 않았다.
애초에 엔 캐리 트레이드 자금 규모를 알 수 없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캐리 트레이드는 금리가 낮은 국가의 통화를 빌려 주식 등 위험자산에 투자하는 거래를 통칭한다. 엔화는 30년 넘게 이어진 일본 중앙은행(BOJ)의 초저금리 정책으로 인해 대표적인 캐리 트레이드 수단으로 활용돼왔다. 전문가들은 2021년 말 미국이 양적완화에 종지부를 찍으면서 그 규모가 폭발적으로 성장했을 것으로 짐작한다. 그런 상황에서 지난달 31일 일본은행의 ‘깜짝’ 금리 인상과 매파적 발언으로 엔-달러 환율이 3거래일 사이 3.9% 급락(엔화 가치 급등)하자 엔 캐리 자금의 청산이 진행 중인 것으로 전문가들은 풀이했다.
엔 캐리를 둘러싼 시장의 염려가 막연한 추산에 그치고 마는 건 엔 캐리 트레이드가 포괄하는 거래 종류가 광범위하기 때문이다. 한국은행은 2013년 낸 보고서에서 엔 캐리 트레이드를 크게 4종류로 분류했다. △외국인이 엔화를 빌려 달러 등 고금리 통화나 자산에 투자하는 형태 △엔화 선물 거래 △일본 개인의 외환 마진 거래 △일본 개인·기관의 해외 투자 등이다. 선물 포지션과 다른 자산 포지션을 결합한 파생 거래까지 고려하면 엔 캐리 트레이드의 범주는 좀더 넓어진다.
거래 관련 데이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도 엔 캐리 분석을 어렵게 한다. 가령 엔화를 빌려 미국 기술주에 투자하는 경우 엔화를 달러로 바꿔야 하는데, 이 같은 현물환 거래는 중앙화된 거래소를 통하지 않고 장외에서 이뤄지는 탓에 규모 파악이 쉽지 않다. 돈에 꼬리표가 붙어있지도 않은 터라 이렇게 달러로 탈바꿈한 엔화를 가려낼 수도 없다. 한 국내 자본시장 전문가는 “엔화를 달러 현물로 바꾸는지 스왑을 하는지, 주식에 투자하는지 채권에 투자하는지 알 길이 없다”며 “엔 캐리 트레이드 규모나 영향에 관한 논의는 눈 감고 코끼리 만지는 얘기에 그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물론 데이터가 존재하는 거래를 통해 그 규모와 움직임을 어림짐작할 수는 있다. 대표 지표가 미 상품선물거래위원회(CFTC) 집계에 나타나는 엔화 선물 포지션 변화다. 지난 6일 기준 미국 시카고상품거래소(CME)에서 투기적 엔화 선물 순매도 포지션은 1만1354계약(1계약=1250만엔)으로, 엔-달러 환율이 최고 수준(161.41원)이던 지난달 2일(약 18만4223계약) 대비 94% 급감했다. 엔화 약세를 점친 투자자들이 급격한 엔화 강세로 손실을 보고 포지션을 청산했다는 뜻이다. “엔화 선물 매도와 여타 자산에 대한 매수 포지션으로 엔 캐리 트레이드를 추구하는 포지션이 엔화 강세 반전에 따른 기존 매도포지션 환매(손절매) 등으로 급격히 축소됐다”(전균 삼성증권 애널리스트)와 같은 풀이는 이 지표를 토대로 나오는 것이다.
규모와 자금 흐름이 손에 잡히지 않다보니, 엔 캐리 트레이드 청산 여부나 그 규모와 무관하게 청산 가능성에 대한 공포가 투매를 불러왔을 거란 분석도 있다. 오석태 한국에스지(SG)증권 본부장은 “엔 캐리 트레이드는 기본적으로 환 위험을 제외한 리스크는 최소화하는 거래인데, 엔화를 펀딩해 전형적인 위험 자산인 미 기술주에 투자한다는 건 말이 안 되는 것 같다”면서 “하지만 최근 엔-달러 환율이 기술주 중심의 나스닥지수와 비슷하게 움직이다보니까 한쪽이 조정되면 다른 쪽도 조정될 거라는 심리가 상승작용을 일으킨 게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시장의 관심은 추가 청산이 글로벌 자산시장에 미칠 영향이다. 박상현 하이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시장 예상보다 더딘 일본 중앙은행의 양적완화 규모 축소 계획과 취약한 일본 경제 펀더멘털(기초체력) 등에 비춰보면 엔화 추가 강세는 제한적일 것으로 본다”고 했다.
남지현 기자 southj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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