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알박기 외교, 잘 먹히는 곳은 한반도…한국, 희생양 안되려면 [매경포럼]

김병호 기자(jerome@mk.co.kr) 2024. 8. 13.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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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전쟁을 통해 우리 외교 아킬레스건의 실체를 명확히 파악했다. 북한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해 언제든 한국을 흔들 수 있다는 것이다. 완전히 새로운 개념은 아니다. 러시아가 한동안 잊고 지냈거나, 동북아시아 문제를 중국에 맡긴 채 사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두 달 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방북 결과를 놓고 우리 측 항의와 민감한 반응 역시 결과적으로 ‘북한 매개로 한국 흔들기’의 유용함을 확인시켜줬다.

24년 만에 방북한 블라디미르 푸틴(왼쪽) 러시아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19일 평양 금수산 영빈관에서 열린 회담에서 1961년, 2000년, 2001년 양국이 맺은 조약·공동선언을 대체하는 ‘포괄적 전략 동반자 협정’에 서명한 뒤 이를 들어 보이고 있다. [연합뉴스]
이 점이 껄끄러운 이유는 러시아 외교의 중요한 한 축이 친러시아 거점을 통한 세력 확장이기 때문이다. 친러시아 지역을 가진 나라들은 이것이 약점이 돼서 러시아를 상대로 힘을 쓰지 못한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 직후 러시아의 조지아 공습은 친서방 정책을 펴던 조지아에 대한 경고였다. 이를 위해 조지아 내부 친러시아 자치공화국이었던 압하지야와 남오세티야가 동원됐다. 전쟁 전부터 러시아는 조지아를 약화시키기 위해 이들 공화국에 자금과 무기를 지원하며 조지아 당국의 국가통합 노력을 좌절시켰다. 조지아 정부가 친서방 기치를 높일수록 러시아는 이들 공화국을 부추켜 조지아에 대한 개입과 간섭을 노골화했다. 결국 종전 후 두 공화국은 러시아 승인 속에 독립했고, 조지아는 이후 친서방과 친러 노선을 놓고 내분에 휩싸였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한때 공격 대상이 됐던 몰도바 역시 친러 공화국(트란스니스트리아)을 두고 있다. 그곳에는 평화유지 명분으로 러시아군이 주둔하고 있다. 몰도바 정부가 러시아 말을 듣지 않으면 이 군대를 동원해 정부 전복과 공화국을 독립시키겠다는 암묵적 위협을 가하고 있다. 캅카스의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가 영유권 분쟁을 벌인 나고르노카라바흐는 러시아 입김에 따라 실질적 주인이 바뀌는 곳이다. 국제법상 아제르바이잔의 역외 영토이지만 러시아는 자국에 맞서는 아제르바이잔을 겨냥해 아르메니아를 편 들며 그들의 자치공화국(아르차흐) 수립을 용인했다. 하지만 지난해 아제르바이잔은 대규모 공습으로 나고르노카라바흐를 장악했고, 현지 아르메니아인들의 대거 피난으로 아르차흐는 해체됐다. 아르메니아는 아제르바이잔과 달리 러시아 주도의 집단안보조약기구(CSTO) 회원국이지만 군사 지원을 받지 못했다며 CSTO 탈퇴를 주장하고 있다. 일각에선 국제사회 제재를 받는 러시아가 아제르바이잔을 통해 물자들을 우회 공급 받으면서 아르메니아를 버렸다는 분석도 나온다.

우크라이나도 마찬가지다. 러시아는 자국계가 많은 크림반도와 우크라이나 동부를 매개로 서방 편에 선 키이우 정부를 압박해왔다. 우크라이나가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나 유럽연합(EU) 가입 얘기를 꺼낼 때마다 러시아는 동부와 크림공화국에서 반정부 활동을 부추겼다. 그래도 잘 안되자 2014년 크림반도에 쳐들어갔고, 지금은 우크라이나 전역에서 전쟁 중이다.

재한 러시아인 반전 단체인 ‘보이시스 인 코리아’가 지난 6월 서울 동대문구 동대문디지털플라자 앞에서 우크라이나 전쟁 중단을 촉구하며 ‘자유 러시아의 날’ 집회를 열고 있다. [연합뉴스]
최근 북·러 밀월 속에서 우리나라가 처한 상황은 러시아한테는 매우 익숙한 장면이다. 친러적인 북한을 매개로 한국을 통제하는 러시아식 외교 기제가 옛소련 밖에서 적용될 첫 사례다. 북한에 러시아의 군사 기술 제공을 놓고 우리가 경기 어린 반응을 보일 때마다 러시아가 속으로 미소 짓는 이유다. 러시아는 앞으로도 북한을 지렛대 삼아 우리를 떠보거나 위협하기를 반복할 것이다. 현승수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지난달 북·러 관련 세미나에서 “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났다고 러시아가 북한을 포기하고 한국에 더 힘을 쏟을 것이라는 생각은 오판”이라고 했다. 종전 후에도 푸틴은 북한 활용책을 지속할테니 대비하라는 얘기다.

러시아가 옛소련 곳곳에서 해온 ‘알박기 외교’ 행태가 외부로 유일하게 확산된 곳이 한반도라는 점은 불편한 일이다. 5000만명 넘는 인구와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이 그런 재수 없는 상황에 놓인다는 것이 서글프기도 하다. 러시아와 북한을 이웃으로 둔 숙명이다. 하지만 체념만 하고 있어선 안된다.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의 옛 러시아대사관 앞에서 시민들이 러시아군의 침공을 규탄하는 시위를 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우크라이나 전쟁은 시련도 줬지만 과거 주변 4강 위세에 눌려 관행화된 순응적 외교 행태를 깰 기회도 된다. 북·러와 서방이 지향하는 가치의 차이가 전쟁으로 명확해진 마당에 우리는 자연스럽게 서방과의 연대에 무게를 둘 수밖에 없다. 이런 배경에서 전쟁 같은 참사를 일으킨 나라와는 타협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천명할 수도 있다. 러시아가 북한에 무기와 기술을 제공하면 우리도 극동 개발 참여나 러시아와의 경제협력은 일체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반면 자유와 민주, 평화를 추구하는 가치가 맞다면 어느 국가와도 협력의 문이 열려있다는 시그널도 보낼 필요가 있다.

러시아가 북한을 숙주 삼아 우리를 겁박할 개연성이 커진 만큼 우리도 외교 방식을 달리해야 한다. 전략적 모호성을 내세워 원칙 없이 이쪽저쪽을 오가면 러시아 ‘알박기 외교’의 희생양이 될 뿐이다.

김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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