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나라', 고 이선균의 마지막 인사가 전하는 울림

아이즈 ize 이설(칼럼니스트) 2024. 8. 13.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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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즈 ize 이설(칼럼니스트)

사진=NEW

14일 개봉하는 영화 '행복의 나라'(감독 추창민)는 여러모로 기대를 모은다.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한 10·26 사태 이후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 그의 부하들에 대한 역사적 재판을 소재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재판은 그야말로 속전속결로 진행됐다. 10·26 사태 합동수사본부장이었던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의 지휘 아래 불과 16일 만에 마무리됐다. 김재규와 그를 따랐던 몇몇 부관들에게 내란목적살인죄가 선고되며 이듬해 사형이 집행됐다. 박정희, 김재규, 10·26, 12·12 등 잊어서는 안 될 비운의 현대사는 그렇게 우리의 기억에 낙인처럼 새겨졌다.

그런데 당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수행비서이자 유일한 군인 신분이었던 박흥주 대령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박흥주는 군인으로서 상관의 명령에 복종해 총을 꺼내 들었다. 청빈하고 강직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거대한 역사의 흐름 속에선 한낱 미약한 인간일 수밖에 없었던 인물이다.

'행복의 나라'는 바로 박흥주를 모티프로 한 박태주(이선균)와 그의 변호를 맡은 정인후(조정석)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김재규보다는 거의 잊히다시피 한 박태주가 과연 어떤 인물이었는지 살펴보고, 가상의 인물인 변호사 정인후를 통해 박태주 재판의 쟁점을 짚어낸다. 당시를 지배했던 이념이나 주의·주장보다는 이들의 인간적 면모에 더 귀를 기울인다.

사진=NEW

박태주의 생애를 다시 곱씹게 하는 건 오롯이 이선균의 몫이다. 이선균이 연기하는 박태주는 고지식한 군인이자 철저한 원칙주의자다. 죽음이 바로 코앞에 있는데도 사실과 원칙만을 고집한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현실과 적당히 타협하고, 승소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정인후의 '전략'을 따를 법도 하건만 요지부동이다. 그렇다면 재판의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하다.

그러나 사건의 결말을 알고 있는 관객들에게 박태주의 강고한 태도가 새삼 관심을 끄는 것은 이선균의 절제된 연기 덕분이다. 

사실 스크린 속에서 박태주는 별 말이 없다. 정인후의 속사포 같은 대사와 설득에도 대꾸가 없다. 연기를 하고 있나 싶을 정도로 정적이다. 하지만 담담한 표정만으로도 군인이자, 한 가족의 가장으로서의 인간적 고뇌를 드러낸다.

그간 이선균의 필모그래피와 캐릭터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었던 인물이다. 아시다시피 이선균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드라마 '하얀거탑'(2007)의 정의로운 의사 최도영이고, 시청률 절정 '파스타'(2010)의 까칠한 셰프 최현욱이며, '나의 아저씨'(2018)의 지극히 평범한 직장인 박동훈이다. 한 번 들으면 귀에 꽂히는 명품 보이스를 가졌지만, 그는 그 역할이 강렬하든 평범하든 상관 없이 마치 그랬던 것처럼 완벽하게 녹아들었다. 특히 지난해 잇달아 선보였던 영화 '킬링 로맨스'와 '잠'에서는 그의 연기 스펙트럼이 어디까지 확장할 수 있는지를 보여줬다. '킬링 로맨스'의 기이하면서도 판타지적인 인물인 조나단을 통해 그는 연기를 위해서라면 어떤 과감한 변신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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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는 내내 이미 고인이 된 이선균의 실제와 박태주의 모습이 겹쳐 가슴을 뻐근하게 한다. 두 딸과 아내를 둔 박태주가 '거사'를 치르기 위해 가족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네는 장면에서 만감이 교차한다. 정인후와의 미팅에선 무표정이지만 홀로 감방에 갇혀 흐느끼는 모습에선 그의 마지막이 스친다. 왜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뒤늦은 안타까움이 밀려든다.

지난달 12일 개봉한 '탈출: 프로젝트 사일런스'와 함께 '행복의 나라'는 결국 이선균의 진짜 마지막 유작이 됐다. 

정인후를 연기한 조정석은 최근 제작보고회에서 "다른 영화에선 볼 수 없었던 이선균 배우의 묵직하고도 진중한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시나리오를 처음 읽었을 때부터 박태주를 변호하고 싶은 욕망이 치솟았고, 이야기에 꼭 참여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고 했다. 배우로서 이선균에 대해 존중하는 마음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그런데 연출을 맡은 추창민 감독에 의하면, 이선균도 조정석에 대한 신뢰와 애정이 각별했던 것으로 보인다. 추 감독은 이선균이 이 영화에 참여하게 된 게 조정석 때문이라고 했으며 "'그에게 배우고 싶다'고 털어놨다"고 밝혔다. 추 감독은 "훌륭한 배우가 아직도 호기심과 열망을 가지고 배움의 자세로 연기한다는 데 놀랐다"고 덧붙였다. 이선균이 조정석과 나란히 무대 인사에 섰으면 어땠을까 하고 상상해 본다. 배우로서 그가 바라던 미래의 모습이 무엇이었을지 다시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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