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대통령만 남는다, 기기묘묘한 다수파 전략
미국의 정치학자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렛 콤비는 6년 전 ‘민주주의는 어떻게 무너지는가’(2018)라는 책을 써서 세계의 ‘정덕’(정치 덕후)들에게 강렬한 영감을 주었습니다. 원제에는 ‘어떻게 죽어가는가’(How Die)라는 표현이 쓰였죠. 오만 가지 요인이 있겠으나 레비츠키 앤 지블렛 콤비가 주목한 ‘사인(死因)’은 다음과 같습니다.
‘오늘날 민주주의는 독재자의 쿠데타가 아니라, 선출된 권력의 합법적 정치 행위로 말미암아 위기를 맞는다.’
두 사람이 보기에 민주주의를 보호하는 건 헌법이나 법률·제도보다도 그런 명문화된 규정으로 포획할 수 없는 드넓은 회색 지대에 그어진 암묵적 선입니다. 그 선은 이런 요소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오랜 세월 누적된 정치적 관습, 법을 집행하기 전 망설임과 상대방 눈치, 정치적 반대 진영에 대한 예의 등등. 즉, 정치적 파국이란 법을 어기면서 촉발되는 것이 아니라 이 관행과 예의의 선을 넘으면서 시작된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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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연구에 사례를 하나 보태고자 합니다. 윤석열 정권이 보여주는 미디어 정책·규제기관 운영 전략입니다. 이례적이고, 비상합니다.
기묘한 다수파 전략 : 오직 대통령만
대표 기관은 방송통신위원회(방통위)와 방송통신심의위원회(방심위) 두 곳입니다. 8월13일 기준 두 기구의 위원 구성은 아래와 같습니다.
-방통위: 김태규 부위원장 겸 위원장 직무대행, 이진숙 위원장(탄핵 소추로 직무정지)
-방심위: 류희림 위원장, 강경필 위원, 김정수 위원
방통위 정원은 5명입니다. 보다시피 2명밖에 없죠. 방심위 정원은 9명입니다. 역시 3명뿐입니다. 각각 40%, 33% 위원 구성으로 운영 중입니다.
방통위와 방심위 모두 대통령과 국회가 위원 추천권을 나눠 갖게 되어 있습니다. 방통위는 대통령 2명, 국회 3명이고, 방심위는 대통령과 국회의장, 국회 소관 상임위원회(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가 각각 3명씩 입니다. 행정부와 입법부가 각자의 대리인을 세워 방송·통신 분야 사무를 합의 하에 처리하라는 취지이지요. 그런데 지금 방통위와 방심위에 배정된 인사 5명은 모두 대통령 추천 위원입니다. 윤 대통령은 취임 이후 이들 단체에 국회 추천 위원을 임명한 적이 없습니다.
윤석열 정부 들어서 방통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타임라인을 볼까요.
-2022년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과 함께 전임 정권으로부터 ‘5인 방통위’를 물려받았습니다.
-지난해 3∼4월 임기가 먼저 만료된 위원 둘이 퇴임합니다.
-5월 윤 대통령은 이상인 위원을 본인 몫으로 임명한 뒤 한상혁 위원장을 면직합니다. 그 결과 방통위의 여야 구도는 2대1 여권 우위로 뒤집힙니다.
-8월 전임 정권 시절 부임한 위원 둘의 임기가 마저 만료되고, 이동관 위원장이 윤 대통령으로부터 임명장을 받습니다. 대통령 추천 몫 상임위원만으로 구성된 ‘2인 방통위’가 들어섭니다.
-12월 이동관 위원장이 사퇴하고, 김홍일 위원장이 취임합니다. 이번에는 김홍일·이상인의 ‘2인 방통위’입니다.
-올해 7월 김홍일 위원장이 사퇴하고, 직무대행을 하던 이상인 위원장도 사퇴합니다. 그리고는 7월 말 이진숙 위원장과 김태규 위원이 임명되어 다시 이진숙·김태규의 ‘2인 방통위’가 복원됩니다.
윤 대통령의 방통위 인선 방침에는 일관성이 있습니다.
① 대통령 추천 위원만 임명합니다. 법에 규정된 대통령 추천 몫은 2명, 그리하여 1년 넘게 ‘2인 방통위’가 가동됩니다.
② 국회, 특히 야당이 추천한 위원은 임명하지 않습니다. 더불어민주당이 지난해 3월 최민희 의원을 방통위원 후보자로 추천했으나 대통령은 7개월 넘게 임명하지 않았습니다.
③ 탄핵안이 발의된 위원장은 사퇴합니다. 이동관, 김홍일, 이상인(직무대행)이 모두 이 전철을 따랐습니다. 이진숙 위원장만이 그대로 남아 헌법재판소 결정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기묘한 다수파 전략 : 이견의 싹을 자르다
방통위는 (방송 분야만 따졌을 때) 방송사의 전파 사용 자격을 주기적으로 심사해 갱신하고, 방송사 최대주주를 바꿀 수 있으며, 공영방송 이사진을 선임할 수 있습니다. 강력한 권한이죠. 윤석열 정권의 방통위는 대통령이 임명한 위원 두 명만으로 이 모든 과업을 대통령의 뜻에 맞게 해치웠습니다.
이것이 야당에서 핏대 높이는 “방송장악”이고, “위법적 2인 체제”인데요. ‘2인 방통위’ 운영이 정말 불법인지 여부는 차치하고, 사실 이러한 운영은 매우 이상한 것입니다. 그간 정치인들은 ‘관행’에 따라 방통위원 인사권을 여권에 유리하도록 분배해 왔습니다. 이 관행에 따르더라도 윤석열 대통령은 여야 3대2로 방통위의 주도권을 쥘 수 있습니다. 방통위의 의결 요건은 “재적위원 과반 찬성”. 5명 중 3명이면 충분합니다. ‘2인 체제’를 고집하지 않더라도, 원하는 바를 이루는 데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윤 대통령은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요. 야권 위원이 들어오면서 발생할 일말의 변수조차 용납하지 못할 만큼 뭔가 간절함이 있었기 때문일까요.
당장 눈에 보이는 효과는 이견의 창구인 소수파를 원천 봉쇄하는 일입니다.
윤 대통령 부임 이후 방심위에서는 정연주 위원장을 시작으로 연달아 5명의 야권 위원이 해촉됐고(한 명은 법원 판결 덕에 생환했습니다), 이번에도 윤 대통령은 자신의 몫만 채워 한때 여야 6대2의 기묘한 방심위를 만들어냈습니다.
이 시기 방심위는 다수의 뜻대로 무리 없이 운영되는 것처럼 보였으나, 2명의 소수 위원이 매회의 사사건건 쏟아내는 이견 앞에 썩 순탄치만은 않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류 위원장의 ‘민원 사주’ 의혹, 22대 국회의원선거방송심의위원회의 월권 심의 논란, 통신심의소위원회의 위헌적 인터넷 언론 심의와 맞춤형 규칙 개정 시도 등등 많은 사안이 소수 위원을 통해 외부로 알려졌기 때문이죠.
그 이견의 싹마저 잘라내야겠다는 판단이었을까요. 지난달 출범한 6기 방심위는 말씀드렸듯, 대통령 추천 인사 3명 만으로 운영 중입니다. 5기 때와 달리 6기 방심위에서는 매주 평화롭고 신속한 회의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윤이 윤에게, “이것은 법치가 아니다”
소수파가 제거되고 다수파만으로 운영되는 방통위와 방심위. 윤 대통령은 ‘법대로’ 임명권을 행사했을 뿐이니 문제 될 거 없다는 입장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레비츠키와 지블렛이 지적한 것처럼, ‘법대로’를 앞세운 권력자가 관용과 예의를 저버리면서 법과 제도의 취지를 형해화하는 처사겠지요. 이러한 정치야말로 민주주의에 해롭다는 것이 그들의 진단이었고요.
무엇보다 현행 방통위·방심위의 반민주성을 가장 날카롭게 짚어낸 문장은 다른 아닌 윤석열 대통령 본인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윤 대통령이 지난달 ‘채상병 특검법’을 국회로 돌려보내면서 제출한 재의요구서 속 주장을 옮기면서 줄이겠습니다.
-다수결은 소수파와 다수파의 공개적이고 합리적인 토론을 보장한 의사 결정 과정을 통해서 정당성을 얻는다.
-다수 의견의 오류 가능성, 정치적 악용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소수 의견을 존중하고 대화·합의·타협에 충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러한 노력 없이 ‘법대로’를 주장하며 다수결을 밀어붙이는 것은 ‘중우 정치’로 이어질 수 있다.
그것은 ‘법의 지배’(rule of law)가 아닌 형식적 법치주의, ‘법에 의한 지배’(rule by law)이고, 다수의 폭정과 다수에 의한 독재가 된다.
미디어 잔혹사는?
유튜브 댓글부터 저녁 뉴스 날씨예보까지 미디어의 영토는 드넓습니다. 늘 논쟁이 끊이질 않는 영역이지요. 이곳에 익숙하고도 새로운 전선이 들어섰습니다. 언뜻 정치적 이전투구에 지나지 않는 듯 보이지만 실은 우리의 일상에 깊이 연루된, 자유에 관한 싸움이기도 합니다. 그 투쟁담을 중계해드립니다.
박강수 기자 turne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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