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하게, 침묵으로, 디테일로… 최악의 정치재판 되새기다[영화 ‘행복의 나라’]
고 이선균, 김재규 수행비서관役
10·26재판 16일만에 총살 당해
절제된 감정으로 희생자 그려내
조정석, 시대에 각성하는 변호사
엄혹한 상황 관찰자 역할도 수행
유재명, 전두환 새 이미지 만들어
대사만으로 숨 죄는 싸늘함 표현
실화 바탕 영화에서 배우의 연기는 절대적이다. 우리가 익히 아는 실제 역사의 인물이 어떻게 극적으로 구현되는지 지켜보는 건 시대 영화의 최대 관전 포인트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영화 ‘행복의 나라’(14일 개봉)는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다. 영화에서 삼각 구도를 이루는 조정석, 고 이선균, 유재명이 모두 호연해 탄탄한 존재감을 보여준다. 저마다의 화제성도 크다. 조정석은 ‘파일럿’으로 여름 극장가를 주도하고 있고, 디즈니+ ‘노웨이 아웃: 더 룰렛’에서 연쇄살인범을 연기한 유재명도 상승세다. 그리고 지난해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이선균을 스크린에서 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다.
영화는 대한민국 헌정사상 가장 뜨거웠던 1979년을 배경으로 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시해됐던 그해 10월 26일에서 시작해 12월 12일 신군부의 군사 쿠데타를 가로 지른다. 10·26 사태를 긴박감 있게 묘사한 ‘남산의 부장들’이나 12·12 사태를 정조준한 ‘서울의 봄’과 비교되는 이유다. 그러나 영화는 굵직한 두 사건 사이에 있었던 한 피고인의 재판에 집중한다.
당시 박 전 대통령을 저격했던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수행비서관 박흥주가 모델인 박태주가 그 주인공이다. 10·26 사태 피고인 중 유일한 군인으로서 군사법정에서 재판 16일 만에 사형을 선고받고 총살당한 인물이다. 전도유망한 육군 대령이었지만 달동네 슬레이트집에 살았고, 전 재산은 고작 400만 원이었던 인물이다.
이선균은 과묵하지만 청렴한 참군인 박태주를 인자한 내면이 있지만 겉으론 결코 부드러움을 드러내지 않는 단단한 ‘바위’같이 연기했다. 이선균은 대사도 거의 없이, 극도로 절제된 감정 표현만으로 야만의 시대에 희생된 인물을 표상했다. 추창민 감독은 지난 8일 인터뷰에서 “이선균이란 배우는 실제론 개구쟁이 같지만, 그 안에 바른 면이 있다고 생각했다”며 “이 역할을 하면 더 빛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박태주를 변호하는 변호사 정인후는 조정석이 맡았다. 가상 인물로 영화에서 가장 변화 폭이 크다. 초반 “재판은 옳고 그름을 가리는 데가 아니에요. 이기는 놈과 지는 놈 가리는 데지”라고 내뱉는 정인후는 재판 과정에서 “살 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부르짖는다. 정인후의 극적 변화를 자연스럽게 메우는 건, 특유의 능청스러움으로 역할에 빛을 내는 조정석의 개인기다.
정인후란 캐릭터는 1979년 사람이 아닌, 현재 대한민국 사람이 엄혹한 시대를 겪는 관찰자란 인상을 주기도 한다. 의상과 말투, 행동이 주변 인물과 달리 현대적이기 때문. 감독의 전작 ‘광해, 왕이 된 남자’ 역시 광해군과 닮은 하선(이병헌)이 궁 내부를 관찰하는 느낌을 줬다. 추 감독은 “정인후를 제외한 인물들은 모두 그 시대에 흘러가는 사람이라면, 정인후는 시대 흐름에 맞추지 않는 세속의 사람”이라며 “그런 점에서 구별되는 지점이 있다”고 말했다.
전두환을 모델로, 이들과 대립각을 세우는 보안사령관 전상두는 유재명이 연기했다. 유재명은 서늘하고 냉혹한 ‘뱀’ 같은 권력자 이미지를 새롭게 만들어냈다. 초반 정인후에게 ‘군인이란 무엇인가’를 설교하는 전상두는 대사만으로 숨을 죄어온다. 기자와 만난 유재명은 “어쩔 수 없이 배우는 자신의 역할을 정당화시켜야 한다”고 운을 뗀 뒤 “한 줌도 안 되는 것들이 나랏일에 주제넘게 나서려고 하는 것에 선을 긋는 태도를 보여주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교장 선생님이 학생을 쓱 보면서 ‘명찰도 제대로 못 찬다’고 한소리 하는 거랑 비슷한 느낌이에요.”
감정의 과잉이 없는 절제된 연출은 세련됐지만, 관객에 따라 건조하다고 느껴질 수 있다. 영화는 시대의 권력자에게 분노할 기회도, 시대의 희생자를 위해 슬퍼할 기회도 주지 않는다.
정인후가 전상두의 골프장으로 찾아가 “왕 하고 싶으면 왕 해라. 그런데 사람은 죽이지 말라”고 외치는 울분은 시원하지만, 절제를 거듭했던 영화의 분위기와 썩 어울리진 않는다. 추 감독은 “판타지인 걸 알지만, 누군가는 그 시대 부조리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해 꼭 넣고 싶었던 장면”이라고 말했다.
이정우 기자 krusty@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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