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파’ 이란 대통령 행보 주목…“최고지도자·군부와 줄타기가 관건”
유달승 한국외대 교수 “대미 관계 개선 의지 보여”
하미드레자 아지지 “군부 자극 않는 실용적 접근 필요”
하미드레자 골람자데 “사회 긴장 완화 노력할 듯”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서 지난달 31일 발생한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 정치 최고지도자 이스마일 하니야 암살 사건으로 이란과 이스라엘이 전면전의 소용돌이로 빨려드는 게 아니냐는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마수드 페제슈키안 이란 새 대통령의 행보가 주목받고 있다.
페제슈키안 대통령은 유일한 개혁 성향 후보로 나서 보수파 후보를 꺾고 지난달 5일 대선에서 파란을 일으키며 당선된 인물이다. 개혁파 모하마드 하타미 대통령 재임 당시에는 보건부 장관(2001∼2005년)을 지냈다. ‘개혁주의 전선’(이슬람 공화국 체제 아래서 정치사회적 개혁을 주장하는 정당·정파 연합)과 공식 연계된 대통령 당선은 약 20년 전인 2005년 이래 처음이다.
최고지도자와 군부 사이에 절묘한 줄타기가 필요한 이란 대통령에 지난달 30일 취임한 그의 미래에 대해, 국내외 전문가의 진단을 통해 짚었다. 전문가들은 이란 대통령은 최고지도자의 존재 때문에 권한에 한계가 있지만, 역할의 중요성을 간과할 수 없다고 공통적으로 지적했다.
이스라엘과 ‘전면전’ 피할 수 있나
최근 페제슈키안 대통령이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 최고지도자는 물론 강경파 군부까지 ‘설득’해 이스라엘과의 전면전을 피하려 한다는 서방 언론들 보도가 이어지고 있다. 영국 텔레그래프는 9일 이란 대통령 측근을 인용해 그가 하니야 암살에 대한 이란 이슬람혁명수비대의 보복 대응 수위를 낮추도록 노력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혁명수비대는 텔아비브 등 이스라엘 내 군 기지를 직접 타격하려고 하지만 대통령은 이스라엘에 대한 직접 타격이 “심각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우려하며 이라크 등 인접국에 있는 이스라엘 비밀 기지를 타격하자는 ‘대안’을 제시했다는 것이다.
이란 정부가 이스라엘과의 전면전을 피하려는 징후는 최근 외교적 대응에서도 엿보인다는 지적이 있다. 지난 7일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이란과 파키스탄의 요청으로 이슬람협력기구(OIC) 긴급회의가 소집됐다. 이 기구는 성명을 내어 하니야 암살이 “이스라엘에 전적으로 책임이 있으며 강력히 규탄한다”고 비판했다. 이어 이스라엘이 “국제법과 유엔 헌장을 명백히 위반”하고 “이란의 주권과 영토 보전, 국가안보를 심각하게 침해한다”고 지적했다. 유달승 한국외대 이란학과 교수는 9일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이란이 “물리적 충돌보다 단계적, 정치적으로 해결하고자 한다는 신호를 보인 것 같다”고 말했다.
하미드레자 골람자데 테헤란시 국제 업무 담당 부국장은 한겨레와 한 이메일 인터뷰에서 “이란이 군사 옵션만 검토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라며 다른 한쪽으로는 “이란의 방어권”을 강조하기 위한 외교적 해법 역시 함께 사용될 것이라고 말했다.
대미 외교 방향은?…‘이란 핵 협정’ 살아날까
페제슈키안 대통령은 지난달 30일 취임 직후 2015년 ‘이란 핵 협정’(포괄적공동행동계획·JCPoA) 타결 당시 주역들을 다시 불러모으고 있다. 그는 취임 직후 모하마드 자바드 자리프 전 외무장관을 전략 담당 부통령에 임명했다. (다만, 자리프 이란 전략담당 부통령은 11일 대통령이 발표한 장관 인선 결과에 만족하지 못한다며 사임 의사를 밝힌 상태다.) 최근에는 아바스 아라그치 전 외무차관을 새 외무장관 후보자로 지명했다고 11일 로이터 통신이 전했다. 자리프 부통령은 2015년 핵 협상 당시 대외 정책 책임자였다. 아라그치 후보자는 하산 로하니 정부가 출범한 2013년 국제문제·법률 담당 차관으로 임명돼 핵 협상 실무를 했다. 합의가 타결된 2015년부터는 이행 점검위원회 이란 쪽 대표를 맡았다. 유 교수는 “대미 관계 개선 의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인사”라고 말했다.
이란에서 국정에 대한 최종적 결정 권한은 최고지도자에게 있고 국방·안보 분야 현안의 경우 군부의 영향력이 막강하다. 하지만 국가안전보장회의 수장을 겸하는 대통령이 외교·안보 정책 결정 과정에서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특히 이란에서 개혁파, 중도파 대통령이 취임했을 때 이란은 끊임없이 관계 개선을 추진했다. 2015년 중도파 하산 로하니 대통령(2013∼2021년)은 버락 오바마 당시 미국 대통령과 물밑 협상을 거쳐 타결한 핵 협정이라는 결실을 냈다. 유 교수는 “핵 문제를 경제 제재와 연결시켜서 협상하자고 제안한 건 로하니 대통령”이라며 “당시에도 최고지도자는 하메네이였는데 대통령이 바뀌니 외교 정책이 근본적으로 전환됐다”고 설명했다. 1997년 개혁파인 하타미 대통령(1997∼2005년)도 미국에 화해 제스처를 보냈다. 유 교수는 미국 민주당 정부, 이란 개혁파 정부가 만날 경우 특히 “관계 개선 여지가 많다”고 했다.
하지만 대미 화해에 걸림돌이 될 도전 과제도 적지 않다. △이란의 핵 프로그램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 지원 △이스라엘과의 관계 악화 등은 대미 외교 관계 개선을 위해 필수적이지만 동시에 이란이 내려놓기 어려운 문제다. 특히 레바논 시아파 무장정파 헤즈볼라 등에 대한 지원은 서방과의 외교 관계 개선에 걸림돌인데도 이 문제를 군부가 장악하고 있는 터라 대통령이 손을 쓰기가 어렵다. 독일 국제문제위원회의 하미드레자 아지지 중동 및 아프리카 분야 비상임 연구원은 지난 8일 발표한 보고서에서 “페제슈키안이 이 둘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감 있게 줄타기를 하느냐가 관건”이라고 말했다.
사회·경제 변화 물꼬 트일까…히잡 시위 대응은?
전문가들은 페제슈키안 정부에서 여러 사회·경제적 변화가 있을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특히 히잡 착용 규정, 인터넷 제한과 같은 사회 정책 분야에서 의미 있는 변화가 예상된다. 낮은 투표율과 시민들의 정치적 무관심 속에서도 개혁파 대통령이 승리한 것은 분명 “변화를 갈망하는 나라에서 점진적 진전을 이룰 기회”가 됐다고 아지지 연구원은 말했다.
히잡 반대 시위에 대한 정부의 대응이 좀 더 유연해질 가능성이 높다. 골람자데 부국장은 이란이 이슬람 율법을 따르고 있기 때문에 히잡 의무 착용과 관련한 법이 바뀌지는 않을 것이라면서도 정부가 강력한 단속과 같은 공권력 사용은 자제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는 “사회적, 문화적 문제가 단순히 법이나 규제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다는 점은 분명하다”며 “새 정부는 무력 사용을 줄이고 사회 긴장을 완화하기 위해 노력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다른 한쪽에서는 의회나 다른 기관이 (관련) 법안을 개선하고 문제를 처리하는 방법을 명확히 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유 교수도 “대통령이 지지층 결집을 위한 내부 개혁 차원에서 히잡 반대 시위와 관련한 진일보한 정책을 내놓을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봤다.
그러나 현재 이란 의회에서 강경파가 다수 의석을 확보한 상태다. 무엇보다 이란에서 최고지도자를 등에 업고 정치, 경제 등 각 분야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군부, 이란 혁명수비대와의 관계도 새 정권의 성공을 위해 핵심적인 부분이다. 아지지 연구원은 그의 개혁 의제와 혁명수비대의 이익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는 게 효과적인 정책 실행의 핵심이 될 거라며 “군부의 저항을 자극하지 않는 실용적 접근 방식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유 교수도 “최고지도자의 지지를 등에 업은 혁명수비대 (출신 인사)는 경찰청장 등 정부 요직을 차지하고 있다”며 “그들이 협조하지 않으면 일을 하기 어렵다”고 했다.
페제슈키안 대통령은 선거 운동 때 서방의 제재 해제를 위해 노력하고, 이란 시장을 외국인 투자자에게 개방하고 국제 무역을 용이하게 해 경제를 회복하겠다는 접근 방식을 취한 바 있다. 하지만 서방 제재로 누적된 경제 위기를 극복하는 문제는 “단기간 안에 회복이 쉽지 않다”고 유 교수는 지적한다.
노지원 기자 zo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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