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의사’들은 다 어디에 있나 [시민편집인의 눈]
제정임 | 세명대 저널리즘대학원장
앤서니 파우치는 38년 동안 미국 국립알레르기·감염병연구소(NIAID) 소장으로 일한 전설적인 의사이자 과학자, 보건 행정가다. 도널드 트럼프 당시 대통령이 2020년 대선에 불리할까 봐 코로나19 방역을 흔드는 허위 주장을 마구 던질 때, 단호하게 각을 세운 소신파로도 유명하다. 2022년 말 은퇴한 그가 최근 ‘당직: 한 의사의 공공 복무 여정’이라는 회고록을 냈다. 에이즈, 사스, 메르스, 에볼라, 코로나19 등 초대형 공중보건 위기에 맞서 대통령 7명과 머리를 맞대고 백신·치료제 개발 등을 이끌어온 그의 여정이 경이롭다. 아직 치료제가 없는 감염병 환자를 밤새 돌보며, 절망과 환희를 오간 의사 파우치의 모습도 감동적이다. 그는 광적인 트럼프 지지자의 ‘가족 몰살’ 등 협박에 시달려 경호까지 받아야 했다. 그러나 미국인 다수는 식당과 거리에서 그에게 기립박수를 보낼 정도로 존경을 표했다. 그와 동료 의사들의 헌신 덕에 생명을 지켰다는 인사와 함께.
코로나19가 한창일 때, 우리에게도 정은경 질병관리청장 등 존경하는 의사가 있었다. 하지만 의-정 갈등이 심각한 지금, 의사 집단을 보는 시민의 눈길은 매우 차갑다. 국내 의사들은 높은 수입 등 기득권을 지키려 의대 증원에 반대하며, 파업·휴진 등으로 환자를 팽개치는 이기주의자로 비치고 있다. 전공의와 의대생들은 성적 지상주의와 우월감에 사로잡혀, 돈 많이 버는 진료로 보상받겠다고 벼르는 타산적 집단으로 의심받고 있다.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 생활’ 등에 나오는, 사명감과 인간미 넘치는 의사는 현실에 없는 거냐고 묻는 사람들도 있다.
파우치 박사 등 전문가들은 기후위기 등의 영향으로 ‘더 센 감염병’이 언제든 닥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출구가 보이지 않는 의-정 갈등은 불안을 넘어 공포감을 준다. 이미 ‘응급실 뺑뺑이’ 등 필수의료 공백과 지역의료 소외가 심각한 한국에서, 이 사태가 제대로 수습되지 못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한국은 국공립병원 등 공공병상 비중이 전체의 10% 안팎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약 70%)의 7분의 1에 불과한 나라다. 정부와 갈등 중인 민간병원의 시설과 인력을 다음 팬데믹 때 원활하게 동원할 수 없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사실 한국 의사들 다수가 ‘돈벌이’에 집착하는 것도 빈약한 공공의료와 무관하지 않다. 전체 병상의 90%가 더 많은 수익을 위해 경쟁해야 하는 민간병원이다 보니, 돈벌이가 병원과 의사의 지상과제가 된 측면이 있다. 공공병원에서 월급 받는 의사가 다수인 독일에서는 의대 증원을 의사들이 환영했다. 격무를 줄일 수 있어서다.
내년 의대 증원은 확정됐고, ‘집 나간’ 전공의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한다. 증원 규모와 추진 과정에서 정부가 무리수를 둔 탓에 의사단체와 정부의 대화는 끊겼다. 돌파구를 열기 위한 언론의 역할이 절실하다. 무엇보다 과격한 단체가 과잉 대표되지 않고, ‘슬기로운 의사들’이 대안을 낼 수 있도록 멍석을 깔아줄 필요가 있다.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는 지난 6월 성명을 통해 “의대 교수들의 진료 중단은 벼랑 끝에 놓인 환자들의 등을 떠미는 행위”라고 비판하며 의료 공공성을 높이는 개혁을 촉구했다. 거점뇌전증지원병원협의체 등도 환자를 위기에 빠뜨리는 의사들의 자성을 촉구했다. 의사·간호사·의료기사 등으로 구성된 좋은공공병원만들기운동본부 등은 지역거점병원 중심으로 공공병상 비중을 높이고, 수도권 상급종합병원 병상은 억제해 공공·필수·지역의료를 강화하는 등의 개혁안을 제시했다. 주치의 제도 등 의료전달체계를 합리화하는 방안, 백신과 치료제 개발 등에 전념할 의과학자 양성도 제안됐다.
한겨레는 ‘의료개혁, 공공성 개혁부터’ 시리즈를 통해 공공의료 강화 필요성을 설득력 있게 제시했고, 전문가 연속 기고를 통해 독자의 관점 확장을 도왔다. 앞으로는 의료계 안팎의 대안과 국외 사례 등을 더 넓고 깊게 취재해, 정치권·정부·의료계가 선택할 수 있는 ‘정책 메뉴’를 선명하게 제시해주면 좋겠다. 집 나간 전공의를 고려한 대안도 넣어서. 정부, 의사와 함께 언론도 ‘지금 중병을 치료해야 하는 가족이 있다’는 절실한 마음으로 의료개혁의 해법을 찾아주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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