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광장] 경계가 사라진 시대
십수 년 전만 해도 우리 사회는 명확한 경계 없이 이것저것이 섞인 모호한 것에 관대하지 않았다. '경계가 존재한다는 것'은 뚜렷한 '기준'이 있다는 것이고, '구분'이 지어지며, '한계'가 존재하는 것으로, '경계가 명확한 것'을 객관적이고 합리적이며 명료하게 정리된 '선한 가치'로 인정했다.
언젠가부터 우리 사회에 '퓨전'이라는 용어가 등장했다. '퓨전'은 융합, 결합의 뜻으로, 서로 경계가 다른 두 가지 이상의 것이 상호작용을 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것을 의미한다. 최근 미술, 음악, 문학, 음식, 패션 등 다양한 문화 영역에서 퓨전은 새로운 트렌드로 자리 잡고 있다. 예컨대 한식과 양식 퓨전 요리는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으며, 이는 전통적인 음식 문화의 경계를 허물고 있다. 예술 분야에서도 과거에는 각각의 예술 장르가 뚜렷이 구분됐으나, 오늘날에는 경계가 점점 흐려지고 있다. 경계를 허물고 융합으로 새로운 가치를 만드는 '퓨전'이 이제는 모든 분야에서 '긍정적인 가치'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전통적으로 뚜렷하게 구분되던 산업 영역 간 경계도 무너지고 있다. 인공지능, 사물인터넷, 빅데이터, 클라우드 컴퓨팅 등 4차 산업혁명의 혁신적인 기술들이 상호작용을 하며 전통적인 산업 경계를 허물고 새로운 산업 구조를 만들고 있다. 자동차 산업은 단순한 기계 제조업에서 벗어나 인공지능, 자율센서, 초고속 무선통신 기술과 융합한 첨단 ICT 산업으로 변화하고 있다. 헬스케어 산업은 디지털 기술과 융합해 스마트 건강 모니터링, 의료 데이터 분석, 텔레메디슨, 의료 로봇 등 첨단 서비스를 제공하는 디지털 산업 영역으로 진화하고 있다. 이러한 융합은 모든 산업 분야에서 진행 중이며, 전혀 새로운 형태의 산업과 비즈니스 모델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비즈니스 환경 변화로 인해 업종 간 경계가 모호해지는 현상을 '빅블러(Big Blur)'라고 한다. 'Blur'란 영어로 '흐릿해진다'는 의미로 '빅블러'는 4차 산업혁명 시대 핵심 키워드이며, 우리 일상에 파고든 새로운 트렌드이자 기업들의 생존 전략으로 부상하고 있다.
빅블러를 설명할 수 있는 대표적 사례는 아마존이다. 온라인으로 도서를 팔던 아마존은 정보기술을 기반으로 전자상거래, 미디어 유통, 클라우드 기업으로 변신하고 있다. 구글, 네이버와 같은 빅테크 기업의 소매 산업 진출, 차량 공유회사 우버의 음식 배달서비스 시장 진출 역시 빅블러 사례에 포함된다. 카카오도 모바일 메신저로 시작해 은행, 쇼핑까지 비즈니스 영역을 늘려 가고 있다. 국내외 기업들이 ICT 기업 또는 타업종과의 융합을 통한 시너지 창출에 주력하고 있는 만큼, 앞으로 놀랄 만큼 획기적이고 이색적인 컬래버는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초연결 시대, 첨단 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경계가 허물어지는 현상은 앞으로 더 가속화되고, 업종 구분 없이 모두가 서로 경쟁하는 무한경쟁 시대에 진입할 것으로 관측된다. 서로 섞이고 융합하기 위해서는 변화를 흡수하는 적응력과 함께 수요를 따라잡는 속도가 매우 중요하다. 기업이 변화를 느리게 수용하면 결국 레드오션의 벽에 부딪힐 가능성이 커지게 된다. 기업들이 사회가 원하는 요구에 맞춰 가려면 창의적인 사고와 비즈니스에서의 '경계 허물기'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희망적인 것은 경계가 모호한 사회에는 새롭게 도전할 다양한 기회 또한 존재한다는 점이다. 기존의 경계가 무너지고 융복합 현상이 활발해지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세상이 우리 눈앞에 펼쳐지고 있다. 기업도 개인도 한 우물만 파서는 살아남기 어려운 시대다. 서로가 섞이고 융화되는 합을 만들기 위해서는 변화된 시대에 맞도록 경계를 낮추고 지워야 한다.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변화를 과감하게 수용하고 더 나은 모델로 진화시키는 혁신적인 리더십이,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리더의 덕목으로 떠오르고 있다. 이진숙 전 충남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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