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으로 메마른 땅, 싹 못 피운 당근…“작년은 이추룩 덥진 안해수다”
“작년은 이추룩까지 덥진 안해수다. 해마다 더워지난 내년엔 8월 나사 감직허우다. 젊은 사람덜은 먹엉살젠허민 이젠 촌을 떠나사쿠다. 너무 힘든게마씸.”(지난해에는 이렇게까지 덥지는 않았어요. 해마다 더워지고 있으니 내년에는 8월이나 돼야 파종할 것 같아요. 젊은 사람들은 먹고살려면 이제는 농촌을 떠나야겠어요. 너무 힘듭니다.)
12일 오전 11시. 제주의 당근 주요 산지인 제주시 구좌읍 행원리에서 만난 김승필(54)씨가 당근밭에서 돌아가는 스프링클러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이미 아침 일찍 집을 나서 여기저기 조그맣게 흩어져있는 밭에 물을 대고 온 김씨의 콧등에는 땀이 송송 배어있었다.
온 세상을 달굴 듯한 뜨거운 태양이 힘없이 돌아가는 스프링클러 사이로 사정없이 꽂혔다. “이렇게까지 폭염이 지속한 적은 많지 않다”는 그는 밭에 쪼그리고 앉아 싹이 발아하는지 살폈다. 돌담 사이 그늘에 의지해 참깨를 털어내던 아내 김숙자(50)씨도 “비가 내리지 않아 큰일”이라고 거들었다.
김씨 부부와 말하는 사이 길가에는 관광객들이 탄 렌터카가 간간이 지나고 그 사이로 물차를 실은 농사용 트럭들이 오갔다. 도로 양쪽은 대부분 당근밭인데, 싹이 제대로 발아하지 않는 밭이 태반이었다.
김씨 부부는 행원리 내 9곳의 밭 7천여평에 당근농사를 짓고 있다. 지난달 23일 당근 파종을 했지만 발아가 되지 않아 9곳 가운데 2곳 1천여평은 다시 파종했다. 폭염에 땅이 충분히 젖지 못한 탓이다.
땅이 마르고 있지만, 밭에 설치된 스프링클러도 한번에 가동하지 못한다. 물이 부족한데다 농업용수의 수압이 약한 탓이다. 아내 김씨는 “스프링클러 수압이 약해서 안개비처럼 흩뿌린다고 해서 그렇게 부른다”며 밭에서 칙칙칙칙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안개비’를 가리켰다.
이랑별로 설치된 스프링클러에서 나온 물이 어느 정도 밭을 적시면, 곧장 잠그고 다음 이랑에 있는 스프링클러를 가동한다. 김씨 부부의 당근밭도 그렇게 하고 있다. 24시간 스프링클러를 가동하지만, 폭염에 마르는 땅을 적시긴 태부족이다. 구좌 지역의 밭은 비가 내려도 물이 잘 빠지는 모래밭이 대부분이다.
땀을 흘리며 조그만 그늘을 찾은 남편 김씨가 “폭염과 가뭄이 계속돼서 날마다 물을 주러 돌아다니고 있다. 아래쪽 마을에는 지하수 관정 수압이 약해 물탱크를 설치한 트럭들이 줄줄이 물을 실으러 오고 있다”며 그리로 가볼 것을 권유했다. 김씨의 말대로 1㎞ 남짓 마을 쪽으로 내려가자 행원 연대봉 입구에 설치된 농업용수를 받기 위해 농사용 차들이 길가에 대기한 모습이 보였다. 지하수 관정에서는 물이 콸콸 쏟아지고 있었다.
이곳에서 만난 이유성(76)씨는 하루에 6차례 물을 받으러 온다고 했다. 1천리터 용량의 물탱크 2개에 물을 받던 이씨는 3500여평의 밭에 당근 농사를 짓고 있다. 50년 이상 농사를 짓고 있는 그도 김씨처럼 최근 재파종했다. 이씨는 “물이 부족해서 표면만 축축하게(젖을 정도로) 물을 주고 있다. 지난달 28일 당근 파종을 했는데 싹이 나지 않아 7일 다시 파종했다”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김승만(64) 전 행원리장은 당근농사만 1만평 이상 하는 대농이다. 김 전 이장은 “행원리의 경우 50% 이상 재파종했다고 보면 된다”며 “구좌 지역 당근 농경지가 대부분 모래지역이어서 용수를 공급해도 금방 빠져 버린다”고 말했다. 김 전 이장은 “지난달 10일 파종을 했는데 24일에 폭우가 한차례 쏟아졌다. 폭우로 오히려 땅이 굳어지면서 그 전에 발아해서 올라오던 싹들이 올라오지 못했다. 또 폭염이 계속되자 토지가 뜨거워지면서 아예 녹아버렸다”고 설명했다.
김 전 이장은 “1차 산업은 농업용수가 기본 아니냐. 윗마을 송당리 저류조의 물을 공급할 수 있도록 송수관이 연결돼야 하는데 연결되지 않아서 문제다. 또 농업용수관이 낡아 누수율이 40%에 이르는 것도 문제”라고 말했다.
기록적인 폭염과 장마가 이어지면서 농축산물 가격이 오르는 ‘기후플레이션’(기후+인플레이션 합성어) 경고등이 커졌다. 폭염으로 인한 시듦병 등으로 전국적으로 농산물 작황이 부진을 겪고, 고온에 취약한 닭과 양식어류들이 집단 폐사하면서 농수축산물 가격 상승이 한동안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의 농업관측연보를 보면, 올 8월 전국 배추 도매가격이 1만6000원(10㎏ 기준)으로 직전 5년간 8월 평균 가격(1만2358원)과 비교해 29.5% 올랐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은 배춧값이 오르는 이유에 대해 전년보다 재배지 면적이 줄었고, 폭염으로 인한 시듦병 등이 생겨 생산량이 줄어든 결과라고 설명했다.
여름철 이상기후는 오이와 애호박 등의 농작물 생육 부진에도 영향을 미쳤다. 긴 장마와 장기간 높은 습도에 노출돼 노균병이 생길 경우 오이가 제대로 자라지 않아 공급 부족과 가격 상승으로 이어진다. 농수산물식품유통공사 조사 결과 지난 9일 기준 전국 오이 10개 소매가격은 1만4252원으로 전년 8월9일보다 11.1% 올랐고, 애호박은 1개 소매가격이 2094원으로 전년 8월9일보다 33.9% 급등했다. 폭염으로 인한 가금류 폐사 피해도 늘었다. 행정안전부에 따르면 지난 6월11일부터 이달 10일까지 폭염으로 전국에서 가금류 52만6천 마리가 폐사했다.
강순중 전국농민회총연맹 정책위원장은 “폭염과 불규칙한 폭우, 봄철 냉해 등 이상기후가 심화하면서 매해 가격이 급등하는 농산물의 범위가 더 넓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 옥기원 기자 o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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