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어지는 캐즘 보릿고개에…배터리 투자 GO or STOP?
[비즈니스 포커스]
전기차 캐즘(일시적 수요 둔화)에 빠진 배터리업계가 또 다른 난관을 만났다. 실적 부진의 늪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상황에서 설상가상으로 전기차 화재사고까지 잇따르며 전기차에 대한 불안감이 증폭되고 있어서다.
전방 수요 부진의 영향을 피하지 못한 배터리업계는 올해 세웠던 목표를 하향 조정하거나 투자 계획을 미루는 등 속도조절에 나서고 있다.
LG에너지솔루션·삼성SDI·SK온 등 국내 배터리 3사는 올해 2분기 나란히 저조한 성적표를 받아들었다. LG에너지솔루션은 2분기 영업이익이 1953억원을 기록, 전년 동기 대비 57.6% 급감했다. 미국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의 첨단세액공제(AMPC) 수혜분 4478억원이 반영된 것이다. AMPC를 제외하면 2525억원 적자다.
배터리 3사 중 수익성 위주 전략에 따라 가장 보수적인 투자 기조로 견조한 실적을 유지해왔던 삼성SDI도 2분기 영업이익이 2802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37.8% 감소했다. 다만 2분기 AMPC 규모는 79억원으로 이를 제외하고도 흑자를 기록, 배터리 3사 중 가장 선방했다는 평가다.
SK온은 여전히 적자의 늪에서 탈출하지 못하고 있다. SK온은 2분기 영업손실이 4601억원으로 11개 분기 연속 적자를 기록했다. 1분기 영업손실 규모(3315억원)보다 1000억원 이상 확대됐다. 시장에서는 3분기에도 적자를 지속할 것으로 보고 있다.
더딘 전기차 전환에 목표치 줄줄이 하향
LG에너지솔루션은 전년 대비 올해 연간 매출 성장 목표치를 기존 미드싱글(4~6%)에서 ‘20% 이상 역성장’으로 크게 낮췄다. 올해 AMPC 예상 수혜 규모도 45~50기가와트시(GWh)에서 30~35GWh로 축소했다. 주요 고객사인 완성차 업계의 전기차 전환 전략 목표 수정에 따른 것이다.
전기차 수요 둔화에 더해 미국 대선 등 대외 불확실성 확대에 따라 업계는 신규 투자에 신중을 기하고 있다. 바이든 행정부의 IRA 등 전기차 정책에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해온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재집권한다면 그동안 북미 투자를 지속 확대해온 국내 배터리 업체들은 불확실성 증대로 어려움을 겪을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포드는 2026년부터 전기차 공장으로 전환할 예정이었던 캐나다 온타리오주 오크빌 공장을 베스트셀링 내연기관 픽업트럭 ‘슈퍼듀티’의 생산시설로 전환하기로 했다. GM은 올해 전기차 생산량을 전년보다 5만 대가량 줄어든 20만~25만 대 수준으로 줄이기로 했다.
테슬라는 지난 5월 발간한 지속가능경영보고서에서 2030년까지 연간 2000만 대의 차량을 인도하겠다는 계획을 철회했다. SNE리서치에 따르면 올해 1~5월 테슬라의 글로벌 전기차 인도량은 62만6000대로 전년 동기보다 8.8% 감소했다.
이창실 LG에너지솔루션 최고재무책임자(CFO)는 2분기 실적 발표 콘퍼런스콜에서 “글로벌 전기차 수요 성장의 방향성은 분명히 바뀌지 않은 것 같지만 고금리 장기화에 따른 소비심리 위축에 주요 고객사의 전동화 속도조절 강도가 예상보다 높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미국 대선이 가까워지면서 대외 변동성이 확대돼 올해 전기차 시장 성장세가 연초 기대치에 못 미칠 가능성이 매우 커졌다”며 “당초 전년 대비 20%대 중반까지 성장을 기대했으나 20% 초반을 밑돌 것”이라고 전망했다.
LG에너지솔루션은 전기차 캐즘 장기화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현재 진행 중인 신·증설 투자 계획도 재검토하고 있다. LG에너지솔루션과 제너럴모터스(GM)의 미국 합작법인(JV) 얼티엄셀즈는 올해 하반기 준공 예정이던 미시간주 랜싱의 전기차 배터리 3공장의 건설을 일시 중단했다.
앞서 미국 애리조나주의 ESS LFP 배터리 전용 생산 공장 건설을 착공 두 달 만에 일시 중단하기도 했다. 김동명 LG에너지솔루션 최고경영자(CEO) 사장은 최근 임직원들에게 보낸 메시지를 통해 “지금은 투자 속도조절이 필요한 시기”라고 밝힌 바 있다.
이 CFO는 “전기차 캐즘이 길어질 가능성에 따라 기존 공장의 유휴 라인을 다른 애플리케이션이나 신규 제품향으로 전환하는 조치로 기존 공장의 가동률을 최대화할 계획”이라며 “신규 설비투자(CAPEX)의 경우 당분간 전략적, 필수적인 투자에 한해서만 집행하겠다”고 말했다.
“투자 축소는 없다” 삼성SDI만 다른 길
그간 공격적인 투자를 이어가던 SK온도 보수적인 투자 전략으로 선회했다. 전방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공장 라인을 일부 전환하고 양산 일정을 조정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SK온과 포드의 미국 합작법인(JV) 블루오벌SK도 포드의 전기차 관련 전략 변화 등을 고려해 수요 동향에 따라 유연한 계획을 수립할 방침이다.
김경훈 SK온 최고재무책임자(CFO)는 2분기 실적 콘퍼런스콜에서 “하반기에는 수익성 개선을 위해 전사 차원의 원가 절감 활동 등 본원적 경쟁력 강화에 더욱 집중할 계획”이라며 “생산 및 구매 경쟁력 제고 등 기존의 운영 효율성 개선 노력은 물론이고 불요불급한 비용 발생이 없었는지 면밀히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반면 삼성SDI는 계획대로 투자를 이어간다. 투자 속도조절에 나선 LG에너지솔루션·SK온과는 대조적인 모습이다. 삼성SDI는 지난해 말 기준 100GWh 수준이었던 글로벌 생산능력을 2026년 200GWh 이상으로 확대한다는 방침이다. 이를 위해 북미에서 GM(30GWh), 스텔란티스(67GWh) 등과 JV(합작사)를 추진하고 있다.
김종성 삼성SDI 경영지원실 부사장은 “상반기 전지 부문을 중심으로 전방 수요가 당초 전망보다 큰 폭으로 둔화하며 시장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면서도 “중장기적 고성장은 변함없을 것”이라며 올해 계획된 설비투자 규모를 유지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미국 자동차업체 스텔란티스와의 합작공장도 내년 1분기에서 올해 4분기로 앞당겨 조기 가동할 예정이다. 여기에 더해 삼성SDI는 유럽 지역 신규 생산거점도 모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폴란드 현지 언론은 삼성SDI가 항구 도시인 그단스크에 투자를 검토 중이라고 전했다. 삼성SDI 관계자는 "신규 투자와 관련해 장기적 관점에서 검토하고 있으나 투자 규모, 시기, 지역 등은 아무것도 결정된 바 없다"고 말했다.
김윤태 삼성SDI 경영지원실 상무는 “올해 헝가리 법인 증설, 미주 스텔란티스와의 합작법인 공장 건설 등 이미 확보한 수요에 대응하기 위한 투자와 전고체 전지 및 46파이 등 중장기 성장을 위한 필수적인 투자를 진행하고 있다”며 “상반기 기준으로 이미 전년 대비 2배 수준(약 3조원) 투자를 집행했다”고 말했다.
소재사도 캐파 축소하고 해외공장 완공 연기
배터리 소재사들도 전방 수요 약화에 대응해 투자 속도조절에 들어갔다. 롯데에너지머티리얼즈는 스페인 동박 공장 완공 시점을 기존 2025년에서 2027년 6월로 2년 연기했다. 총 5600억원을 들여 연산 3만 톤 규모 전기차 배터리용 하이엔드 동박을 생산할 수 있는 스마트팩토리를 건설할 계획이었지만 캐즘 여파로 고객사의 실적 목표치가 하향 조정된 데 따른 계획 변경이다.
SKC는 올해 동박 시장 출하량 전망이 연초 대비 30%가량 축소되자 하반기 출하량 재설정에 나섰다. 자회사인 SK넥실리스의 폴란드 동박 공장 준공 및 가동 시점도 미루기로 했다.
LG화학은 올해 설비투자 규모를 기존 4조원대에서 3조원대로 하향했다. 미국 테네시 양극재 공장 건설은 계획대로 진행하되, 2026년을 목표로 검토 중이던 국내 NCM 양극재 공장과 모로코 LFP 양극재 관련 투자는 순연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2026년 양극재 생산 목표를 기존 28만 톤에서 20만 톤으로 낮춰잡았다.
LG화학은 일본 도레이와 합작법인 형태로 공장을 운영 중인 분리막 사업 확장도 전면 재검토할 계획이다. 포스코퓨처엠도 올해 설비투자 규모를 기존 3조원에서 2조원으로 줄이기로 하고 내년 설비투자도 2조원 수준으로 유지하기로 했다. 에코프로도 최근 전기차 시장의 성장 속도 둔화 및 변동성을 반영해 중장기 양극재 캐파 하향 및 속도조절을 검토 중이다.
업계 관계자는 “배터리 골드러시 시대가 캐즘을 맞아 생존 경쟁의 시대로 치닫고 있다”며 “배터리업계의 신규 공장 투자 속도조절, 증설 및 가동 재검토는 과잉투자를 방지하고 내실을 강화해 턴어라운드 시점에 시장 선점 기회를 잡겠다는 포석”이라고 말했다.
안옥희 기자 ahnoh05@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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