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에서] 방글라데시 총리 탈출의 교훈

정지섭 기자 2024. 8. 13.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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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겐 이주 노동자 주요 송출국 정도로 알려진 방글라데시의 근현대사는 한국과 닮은 점이 적지 않다. 열강 통치를 벗어나자마자 혹독한 시련을 겪은 것부터가 그렇다. 1947년 영국 식민지에서 독립했을 때는 2000㎞ 떨어진 파키스탄의 일부였다. 지리·언어·인종 등이 완전히 달랐는데도 강대국 이해관계에 휘둘려 온전한 독립을 이루지 못했다.

차별과 탄압 속에 커져간 독립 열망은 고유 언어인 벵골어 사용 운동을 통해 본격적으로 분출됐다. 훗날 초대 대통령이 되는 무지부르 라만이 1971년 3월 독립을 선포하고 파키스탄이 무력 진압에 나서면서 독립 전쟁으로 이어진다. 파키스탄이 항복했으나 이 과정에서 최대 300만명이 목숨을 잃는 등(추산) 피해도 막심했다. 건국 뒤에도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 라만 대통령이 피살되는 등 정치적 혼란이 이어졌다.

좌절의 순간만 있던 건 아니다. 군부 독재에 맞섰던 라만의 딸 하시나가 총선에서 승리해 1996년 총리에 오르던 순간은 민주화의 첫발로 각인됐다. 한반도의 절반 정도 되는 면적에 1억7000만명이 모여 사는 세계 최고 수준의 인구 밀도는 빈곤의 족쇄에서 성장의 동력으로 변모했다. 한국 등 해외로 나간 노동자들의 외화벌이도 경제발전의 주춧돌이 됐다. 해마다 7% 안팎의 높은 경제성장률을 유지하면서 저소득 국가를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도 높아졌다.

그런 가운데 시민 의식이 성숙해 ‘공정’이 사회적 화두로 등장했다. 그 상징적 움직임이 2018년 터져 나왔다. 1971년 독립 전쟁 유공자 가족에게 공무원 채용 인원의 30%를 할당해 주던 제도 폐지를 요구하는 반정부 시위가 대대적으로 벌어진 것이다. 애국자 예우 명목으로 집권 세력끼리 부와 권력을 대물림하는 현실에 분노한 젊은이와 서민이 거리로 몰려나왔다. 놀란 정권은 제도를 폐지했지만, 올해 초 총선 승리 뒤 제도를 부활하려다 대규모 반정부 시위를 촉발했다.

분노의 강도는 6년 전과 비교할 수 없었다. 나라 곳곳에서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가 들불처럼 일었고, ‘민주화의 상징에서 변절한 독재자’로 지탄받던 하시나는 헬기에 급히 몸을 싣고 인도로 도망쳤으며, 성난 군중은 그의 아버지 동상까지 뽑아내려 했다. 모두가 일군 결실을 자신들의 것인 양 이권 대물림의 기회로 활용한 특정 정치 세력의 욕심이 빚어낸 최후다.

이 나라의 궤적 곳곳에서 한국의 어제와 오늘이 겹쳐 보인다. 한국도 열강의 패권 다툼 속에 어렵게 공화국을 세웠고, 동족상잔의 비극을 딛고 반세기 만에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뤄냈다. 그런데 모두가 이룩한 성과를 편을 갈라 폄하하고, 특정 정파가 자신들을 유공자로 치켜세우고 대대로 혜택을 보겠다며 입법을 시도하는 일이 지금껏 벌어져 왔다. 민심을 거스르려는 이들에게 방글라데시의 상황이 타산지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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