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프레소] 전국에 출렁다리만 250곳 넘는다는데
한강공원엔 내·외국인 인산인해
억지로 뭔가를 만들기보다
우리 일상 잘 가꾸기가 핵심
타지 친구들이 서울에 놀러 오면 종종 한강공원에 간다. 여행과 일상의 경계에 놓인 곳. 서울다운 걸 원하지만 뻔하디뻔한 관광지는 싫은 이들에게 한강공원은 안성맞춤이다. 큰돈 들일 필요도 없다. 돗자리 한 장과 만 원짜리 와인 한 병이면 고급 바가 부럽지 않다. 반짝이는 윤슬, 기분 좋게 흘러나오는 음악. 여기에 취해 한강공원을 찾은 게 올해에만 예닐곱 번은 된다.
중학생 시절에도 한강을 자주 찾았다. 학교가 한강에서 멀지 않았던 덕분에 수업이 끝나면 친구들과 한강공원으로 가서 공을 차곤 했다. 하지만 그 시절 ‘한강 고수부지’에 대한 인상은 지금과 사뭇 달랐다. 가는 길이 늘 긴장의 연속이었다. 길목에 있던 굴다리에서 고등학생 형들에게 돈을 빼앗긴 적이 몇 번 있었기 때문이다. 어둡고 더럽고 거미줄 가득했던 그 굴다리를 지나는 것은 마치 축구라는 유희를 즐기기 위해 극복해야만 하는 퀘스트(quest)처럼 느껴졌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2006년 첫 임기를 시작하고 한강 수변 공간 재개발을 핵심으로 하는 한강 르네상스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강변을 덮은 콘크리트를 걷어내고 산책로, 편의점 같은 인프라를 구축했다. 보행 환경도 대폭 정비했다. 한강으로 가는 지하 통로가 바뀌었고 다리에는 버스 정류장과 승강기가 설치됐다. 접근이 쉬워지니 한강에서 가볍게 산책하거나 라면, 치맥을 즐기려는 사람들이 모였다. 팬데믹 이후엔 해외에도 소문이 났는지 한강공원을 찾는 외국인 관광객이 크게 늘었다. 얼마 전에도 반포 한강공원을 찾았는데, 서울 지하철 고속터미널역에서 한강공원까지 가는 좁은 길이 외국인들로 인산인해를 이뤄 적잖이 놀랐다. 그중에는 일본‧중국‧동남아시아 등 아시아인뿐 아니라 서양인도 제법 있었다. 한강공원은 오늘날 높아진 대한민국의 위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소 같았다.
한국관광공사는 올 상반기 한국을 찾은 외국인 관광객이 770만여 명이라고 밝혔다. 구미(歐美) 지역에서 온 관광객도 154만여 명이나 됐다. 그런데 마냥 기쁘기만 한 건 아니다. 이 모든 게 서울에 편중돼 있기 때문이다. 문화체육관광부에 따르면 지난해 외국인 관광객의 80.3%가 서울을 찾았다. 2위인 부산은 17.6%. 광주‧전남은 1%도 되지 않았다(복수 응답). 지방자치단체들은 이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지역을 대표하고 관광객을 끌어모을 관광 상품을 만들려 한다. 출렁다리, 스카이워크, 모노레일, 테마 공원을 만드는 데 수많은 예산을 쏟아붓는다. 어디서 뭐 하나 흥행했다고 하면 천편일률적인 랜드마크가 우후죽순 생겨난다. 그렇게 만든 출렁다리가 전국에 250곳이 넘는다. 흥행은 잠시, 결국엔 파리만 날리는 랜드마크는 오래지 않아 지역의 애물단지로 전락한다.
예나 지금이나 2030세대의 명소 중에서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랜드마크는 거의 없다. 서울 성수동은 낡은 물류 창고와 인쇄 공장을 개조한 카페들이 들어서기 시작하며 ‘한국의 브루클린’으로 거듭났고, 을지로는 오래된 공업사와 인쇄소 사이사이에 있는 노포들이 인기를 끌며 ‘힙지로’가 됐다. 뉴욕타임스가 2017년 ‘올해 가봐야 할 52곳’ 중 하나로 선정한 부산 전포 카페 거리도 원래는 부품 공장 밀집 지역이었다. 상인과 소비자들 덕분에 자연 발생한 이 ‘핫플레이스’들은 그 자체로 훌륭한 관광지가 되고 있다.
요즘 들어 한강공원에 부쩍 늘어난 외국인 관광객들을 보면서, 어쩌면 우리나라의 핵심 관광 자원은 우리의 일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보고 듣던 콘텐츠들이 선망 대상이 된 시대. 매일같이 거닐던 동네, 즐겨 먹는 음식도 호기심 대상이 되고 있다. 그렇다면 뭔가를 억지로 만들기보다, 이 일상을 잘 가꾸는 것이야말로 외국인 관광객을 유치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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