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장애 영유아들, 무대 통해 세상 두려움 극복”

박용필 기자 2024. 8. 12. 2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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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색 공연 ‘빙빙빙’ 연출한 김 경 희 창작그룹 노니 대표
지난 7월28일 서울 모두예술극장에서 상연된 공연 <빙빙빙>의 한 장면. 국립극단 제공
빛줄기·비닐에 드론까지 등장
아이들이 무대서 신나게 놀아
“시각 이외의 다양한 자극 선사
용기와 경험 얻게 해주고 싶어”

공연인데 객석이 없다. 무대는 있지만 배우도 없다. 대신 아이들과 부모들이 무대를 차지하고 있다.

대사도 없다. 아니, 언어 자체가 들리지 않는다. ‘아~’ ‘어~’ 같은 의성어인지 감탄사인지 모를 음성과 중저음의 비트가 반복된다. 스포트라이트 대신 여러 빛줄기가 무대의 어둠을 가르고, 드론이 날며, 비닐 구조물이 등장한다.

지난달 27일 서울 모두예술극장에서 선보인 공연 <빙빙빙>(Being Being Being)의 모습이다. 기이한 공연 형태는 이날 공연의 진짜 주인공인 관객의 특수성에 따른 것이다. 이 공연은 생후 36개월 미만 영유아를 대상으로 했다. 알아듣지도 못할 대사 대신 엄마가 다독여줄 때 내는 ‘오~’ 같은 음성, 배와 등을 간지럽히는 진동을 주는 베이스 비트가 효과음으로 쓰인 것도 이 때문이다.

특히 시각장애가 있는 영유아가 주관객이다. 비장애 아이들은 빛과 드론과 구조물을 눈으로 보고 쫓는다. 시각장애 아이들은 불빛 때문에 미세하게 변하는 바닥 온도, 드론의 날개가 일으키는 바람, 비닐의 촉감을 눈 대신 피부로 느낀다. 시각이 아닌 다른 감각을 통해서도 공연을 즐길 수 있도록 고안된 것이다.

김경희 ‘창작그룹 노니’ 대표(왼쪽)와 손준형 국립극단 어린이청소년극연구소 차장이 지난 7일 국립극단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시각 대신 다른 감각이 극도로 발달했기 때문에 가능해요. 오히려 그 이상의 자극은 아이들에게 공포감을 줘요. 비닐을 쓴 것도 같은 이유예요. 부상 위험이 적잖아요.” 지난 7일 경향신문과 만난 공연 연출자 김경희 ‘창작그룹 노니’ 대표(46)는 “이런 공연이 나온 건 사실 우연이었다”고 했다.

이 공연은 국립극단 내 ‘어린이청소년극연구소’가 주관했다. 공연 문화에서 소외된 청소년층을 위한 무대 콘텐츠 개발을 목적으로 발족한 이 부서는 2018년, 36개월 미만 영유아로 대상을 넓히기로 하고 공연 개발을 김 대표에게 의뢰했다.

“문제는 영유아들이 시각으로 뭔가를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점이었어요. 경험이 시각을 통한 이해의 토대가 되는데 경험 자체가 너무 적은 거죠. 시각이 아닌 다른 감각으로 관람하는 공연을 만들어야 했어요. 그러다 아예 시각장애 영유아도 볼 수 있는 공연을 만들자는 아이디어로 발전했어요.”

처음엔 간단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한 특수학교에 아코디언 등 악기를 준비해서 갔어요. 동요를 연주해주면 좋아할 것으로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건반 하나를 누르자마자 아이들이 놀라서 자지러졌어요. 아이들의 감각은 예상보다 훨씬 예민했어요. 특히 생소한 자극에 노출될 기회 자체가 비장애 아이들보다 훨씬 적었던 거죠.”

원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했다. 아이들에게 ‘공포’가 아닌 ‘호기심’을 심어줄 수 있는 자극의 ‘역치’부터 찾아 나섰다.

“장애가 있는 자녀를 둔 분들을 만날 기회 자체를 갖기가 어려웠어요. 그래서 특수학교들을 수차례 방문했습니다. 선생님과 부모님들을 만났어요. ‘아이가 불안 때문에 웅크리면 (만지지 않고) 부채질을 해준다’와 같은 경험담에서 영감을 얻기도 했죠. ‘익숙한 산들바람’ ‘배를 간지럽히는 진동’ 같은 아이디어도 거기서 나왔어요.”

지난해 9월 국립극장에서 첫 실험작의 쇼케이스가 시도됐다. 그 실험을 바탕으로 탄생한 게 지난 7월 공연이었다. 어린이청소년극연구소 손준형 차장(49)은 공연은 다양한 방식으로 지속되고 발전할 것이라고 했다. 시작은 ‘우연’이었지만 이젠 ‘필연적인 이유’를 찾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예술이란 일상에서 겪기 힘든 가상의 세계를 만들고, 사람들이 그 세계를 경험하고 모험하며 영감과 활력, 용기를 얻게 해주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볼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장애인들은 예술에서 소외됐어요. ‘보이지 않아도 볼 수 있는’ 공연을 개발해야 하는 이유라고 생각해요.”

정말 그럴까? 시각장애가 있는 자녀와 함께 지난 7월 공연을 관람했던 조윤지씨(35)는 ‘그렇다’고 했다.

“이전에 아이는 비닐을 만지지 못했어요. 하지만 지금은 비닐을 무서워하지 않아요. 저는 아이가 ‘모험’을 통해 세상에 대한 두려움을 조금이나마 극복했다고 믿고 있어요.”

글·사진 박용필 기자 phil@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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