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마르크스 경제학의 퇴장

배성규 기자 2024. 8. 12.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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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이철원

얼마 전 이사 가면서 서가를 정리했다. 전공 서적 틈에 먼지가 소복한 마르크스 경제학 책과 노트가 있었다. 곳곳에 친구들과 스터디하고 강의 들으며 적어 놓은 메모와 밑줄이 보였다. 하지만 내용은 거의 기억나지 않았다. “그런 구닥다리 책을 지금도 읽느냐”고 가족이 물었다. 결국 37년 만에 책과 노트를 모두 버렸다.

▶'정치경제학’이라고도 불린 마르크스 경제학은 수요와 공급이 가격을 결정한다는 주류 경제학과 달리 노동이 모든 가치를 결정한다고 믿었다. 자본가가 노동이 만든 잉여가치를 착취하고 이에 따라 잉여 이윤율이 떨어져 불황이 거듭되면서 자본주의가 붕괴한다고 했다. 카를 마르크스의 책은 군사 정권 시절 금서(禁書)였다. 불심검문 때 이 책이 나오면 잡혀갔다. 하지만 1980년대 중반 이후 대학생의 필독서가 됐다. 운동권은 이를 신봉했다. 일반 학생들도 소명감을 갖고 ‘자본론’과 해설서를 읽었다. 난해한 개념과 문장, 방대한 분량 때문에 소화하기 어려웠다. 이름과 내용은 대충 알지만 제대로 읽은 사람은 드문 ‘고전’이었다.

▶대학에선 정식 강좌 개설 요구가 빗발쳤다. 대자보가 붙고 서명 운동도 벌어졌다. 1989년 서울대에서 김수행 교수의 강의가 처음 시작됐다. 학생이 구름처럼 몰렸다. 인문·사회대는 물론이고 공대생도 적지 않았다. 300명 규모의 강의실은 매번 만원이었다. 비좁은 계단과 강의실 뒤까지 학생들이 빼곡히 들어찼다.

▶하지만 1990년대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이 붕괴되면서 마르크스 경제학은 된서리를 맞았다. 운동권식 이념 투쟁의 퇴조, 취업 중심의 실용주의 바람도 컸다. 2000년대 중반엔 수강생이 수십명 대로 줄었다. 서울대는 2008년 김 교수 정년 퇴임 후 후임을 뽑지 않았다. 일부 대학에선 마르크스 경제학을 가르친다고 국정원에 신고가 들어갔다. 김수행·정운영 등 간판 교수들이 잇따라 세상을 뜨면서 명맥이 점차 끊어졌다.

▶서울대는 올 2학기부터 마르크스 경제학을 폐강하기로 했다. 수강생이 급감해 일부 강의는 4명뿐이었다고 한다. 강의 개설 35년 만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동료 엥겔스는 자본론을 펴내면서 “자본가들 머리에 투하된 거대 폭탄”이라며 “자본주의 타도”를 외쳤다. 하지만 실제 무너진 건 공산주의였고 그 기본 이론마저 대학에서 사라지게 됐다. 학문의 다양성이란 측면에선 아쉬운 일이다. 200년 전 교조적 이론에 사로잡혀 급변하는 시대 변화에 따라가지 못한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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