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설]먹이는 존재

기자 2024. 8. 12. 20:03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장면 하나. 친구 집에 놀러 간 날, 1층 세탁기 옆 공간에 누워 높은 천장을 바라보았다. 건물 앞 고시원 명패가 걸린 그곳은 좁은 공간 속 높은 천장을 확보한 복층형 원룸이었다. 친구는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서울로 상경해 천장 높은 집에 둥지를 틀게 되어 좋다면서도 요리를 해줄 수 없어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곳은 화구를 쓸 수 없어 자신이 초대한 손님과 갓 만든 음식 냄새를 맡을 수 없는 곳이었다. 그의 슬픔은 고시원이라는 공간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 타인을 먹이는 존재가 될 수 없다는 사실로부터 비롯되었다.

장면 둘. 지난해 암에 걸린 엄마를 몇년 만에 만났을 때. 그는 더 이상 먹거나 먹일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대장과 주변 소화기관을 침범하는 암세포들은 엄마의 먹는 삶을 가로막았고, 암세포는 가진 힘마저 빼앗아 타인을 먹이는 일을 더는 할 수 없게 만들었다. 1년 지난 엊그제, 암 전이로 엄마를 다시 만났을 때. 어떻게 몸이 이 지경 될 때까지 항암치료를 안 받았냐고 응급실 한복판에서 화를 내자 그는 식당에서 일하느라 병원에 갈 수 없었다고 말했다. 한 번의 성공적인 암 수술이 겨우 찾아준 그의 값진 행복은 무언가를 먹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타인을 다시 먹이는 존재가 될 수 있는 데서 비롯했다. 어쩌면 영원히 먹을 수 없는 상태가 될 때까지 그는 타인을 먹이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그의 힘없는 목소리가 나를 기막히게 했지만, 더할 말이 없었다. 애초에 나는 누군가를 먹이는 존재로 살아본 적 없었으니까. 그 삶의 희열을 알지 못하니까. 늘 차려준 밥을 먹기만 했으니까.

장면 셋. 친구의 삶과 엄마의 건강을 빌 곳이 없어 20년 만에 교회를 찾았다. 열 명 남짓한 신도가 함께 요한복음 6장을 읽었다. 예수가 말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라고.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히 살 거라고. 내가 줄 빵은 나의 살이며 이것이 세상에 생명을 줄 거라고. 유대인이 예수에게 너는 목수 아들이지 하늘의 아들이 아니잖냐고 따지자, 예수는 하늘에서 내려온 증거를 조목조목 대지 않고, 자신이 곧 빵이라며 위와 같이 소개했다. 그 구절을 소리내어 읽는 동안 생각했다. 예수는 모두가 먹기만 바라는 세상에서 이웃을 먹이는 존재로 남고 싶었구나. 구절을 다 읽고 너무 몰입해서 눈물이 나올까 봐 애써 실눈을 뜬 채로 기도했다. 고시원 환경 속 아직 타인을 먹이는 존재가 되지 못한 내 친구의 삶을, 암과 싸우는 몸으로 더 이상 타인을 먹이는 존재가 되지 못하는 내 엄마의 슬픔을 알아달라고.

고학력, 좋은 직장, 막대한 자산, 드높은 권위를 좇으며 게걸스레 먹기 바쁜 먹는 존재들의 성공 아래엔 씻고, 다듬고, 자르고, 나르고, 볶는 행위를 반복하는 먹이는 존재들의 희생이 전제돼 있다. 내 주변 타인을 먹이는 존재들은 먹는 존재들과 달리 밥값을 제대로 셈할 줄 몰랐다. 끝까지 제 살을 떼어주면서 남을 배부르게 하곤, 더 이상 떼어줄 살이 없게 됐을 때 슬픔에 잠겼다. 고마움 없이 먹기만 한 자들에 대한 분노 이전에 더는 떼어줄 제 살이 안 남았다는 사실에서 비롯한 슬픔. 음식점에서 게걸스레 남이 차려준 밥으로 시장기를 채우며 먹일 수 없는 사람들을 떠올리며 먹이는 존재의 슬픔을 생각했다. 숟가락 아래로 더러운 눈물이 흘렀다. 먹이는 존재의 슬픔을 너무 늦게 알아버려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변재원 작가

변재원 작가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