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딸깍발이 법관 ‘조무제 정신’ 이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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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무제(83) 전 대법관이 후배들을 만났다.
조 전 대법관은 청빈한 법관의 전형인 딸깍발이 판사다.
조 전 대법관은 법과 원칙이란 신념과 실력을 아울러 갖춘 딸깍발이 판사였다.
1998~2004년 대법관 재직 뒤 '전관예우' 관행을 깨고 후배 양성을 선택한 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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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빈·신념 본보기 ‘부산에 그가 있다’
조무제(83) 전 대법관이 후배들을 만났다. 그가 건강 문제로 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소식을 지난 5일 국제신문이 전했다. 얼른 찾아봬라는 조희대 대법원장의 지시를 받은 천대엽 법원행정처장이 지난 9일 병문안을 온 것이다. ‘부산판례연구회’를 이끄는 김문관 부산고법 수석부장판사와 동아대 법학전문대학원 송시섭 교수 등이 동행했다. 갈색 모자를 쓴 조 전 대법관은 다과를 후배들에게 건네고, 가끔씩 웃음을 보이기도 했다고 한다. 그가 병원에 입원하며 동아대 법학전문대학원 석좌교수를 그만둔 것이 2022년 초다. 2년 동안 그의 건강을 걱정하는 사람이 많았다. 비록 병원에 있다고는 하나 정정한 모습이라 마음이 놓인다.
천 행정처장은 “조 전 대법관님은 ‘사도법관 김홍섭’에 버금가는 위인”이라며 쾌유를 빌었다. 김홍섭은 강직함과 구도자적 생활로 법조계와 신앙계의 모범이 되었다. 죄수들에 대한 헌신적인 사랑으로 ‘수인들의 아버지’ ‘사도법관(使徒法官)’ 등 별명을 얻었다. 조 전 대법관은 청빈한 법관의 전형인 딸깍발이 판사다. 그는 1993년 첫 고위공직자 재산공개 당시 6400만 원을 신고해 고위 법관 103명 중 가장 적었다. 또 1998년 대법관 취임 때 재산이 7000여만 원이었다. 부산법원조정센터 조정위원 시절 ‘하는 일에 비해 수당이 많다’며 자진 삭감을 고집했다. 무엇보다 대법관 퇴임 후 변호사 개업을 하지 않은 첫 대법관으로 모교인 동아대로 돌아와 후학 양성에 힘썼다.
딸깍발이는 청빈(淸貧), 성품이 깨끗하고 재물에 대한 욕심이 없어 가난함을 빗대어 이르는 말이다. 조 전 대법관은 법과 원칙이란 신념과 실력을 아울러 갖춘 딸깍발이 판사였다. 소장 법관 시절 ‘장래의 대법관’이란 기대를 모았던 그는 부산 법조계의 자부심인 부산판례연구회를 만들었다. 1988년 11월 판사 13명으로 출발한 연구회는 이후 학계 인사와 변호사들이 참여해 수준 높은 법률 이론을 연구하면서 전국에서 가장 모범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딸깍발이 판사라는 별명은 그저 붙여진 것이 아니다.
그는 1970년 부산지법 판사를 시작으로 창원지법원장과 부산지법원장을 지내기까지 줄곧 부산 경남을 지킨 향토 법관이다. 1998~2004년 대법관 재직 뒤 ‘전관예우’ 관행을 깨고 후배 양성을 선택한 그다. 34년 동안 법관으로서, 그 뒤 교수로서 그가 보여준 삶의 궤적은 ‘부산에 조무제가 있다’고 자랑할 만한 훌륭한 자산이자 본보기다. ‘조무제 정신’을 잇자며 동아대 동문들을 중심으로 기념공간이나 기념관을 건립하자는 의견이 나오는 건 자연스럽다. 동아대가 그의 연구실을 보존하고 있어 다행이다. 조 전 대법관 성품으로 미뤄 허락을 얻어내기가 쉽지 않을 수도 있다. ‘난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손사래를 칠지 모르겠으나 그럴수록 더 간절하게 그를 설득해야 한다. 요란하지 않게, 진정으로 조무제 정신을 이어갈 방법을 찾는 건 부산이 꼭 풀어야 할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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