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과주의·꼰대문화’ 고질병… 과감히 메스 대라 [심층기획-돌아보는 2024 파리 올림픽]

장한서 2024. 8. 12. 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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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 종목 편중과 안세영 사태
배드민턴 금 안세영 작심발언 후폭풍
문체부, 협회 운영 실태 등 전반 조사
유인촌 “지금이 체육 정책 개혁 적기”
배드민턴協, 평가위원 점수 30% 반영
위원 주관 따라 대표팀 당락 결정 구조
‘지도자 지시에 복종’ 운영 지침도 논란
신인선수 계약금·연봉상한제 개선 추진
문체부, 체육국장 단장으로 조사단 구성
9월 중 체육 정책 전반 조사결과 발표
2024 파리 올림픽에서 금메달 13개를 휩쓰는 선전을 펼친 한국 선수단에게 이번 대회 아픈 손가락이 하나 있다. 바로 ‘배드민턴 여제’ 안세영(22·삼성생명)이다. 금메달 획득 직후 대한배드민턴협회의 선수 부상 관리와 훈련 지원, 의사결정 체계 등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하는 ‘작심 발언’이 논란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이는 배드민턴협회의 잘못된 운영 문제로 확산됐다.
2024 파리 올림픽 배드민턴 여자 단식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안세영 선수가 지난 7일 인천국제공항 제2여객터미널을 통해 귀국한 뒤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 뉴시스
결국 이 문제에 대해 정부가 본격적인 조사에 나섰다. 문화체육관광부는 12일 “배드민턴협회의 미흡한 부상 관리, 복식 위주 훈련, 대회 출전 강요 의혹 등에 대한 경위 파악뿐만 아니라 그동안 논란이 됐던 제도 관련 문제, 협회의 보조금 집행 및 운영 실태까지 종합적으로 살펴보겠다”고 밝혔다.

구체적으로 △국가대표 선발 과정의 공정성 및 훈련과 대회출전 지원의 효율성 △협회의 후원 계약 방식이 ‘협회와 선수 사이에서 균형을 갖추고 있는지’ 여부 △배드민턴 종목에 있는 선수의 국제대회 출전 제한 제도의 합리성 △선수의 연봉체계에 불합리한 점 등을 들여다볼 방침이다.

유인촌 문체부 장관도 이날 정례 브리핑에서 “지금이 체육 정책을 개혁할 적기”라면서 “배드민턴협회 하나가 아니라 전체적으로 체육 정책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정우 문체부 체육국장이 조사단장을 맡게 될 조사단은 문체부 직원과 스포츠 윤리센터 조사관 등 10명 이상으로 꾸려져 9월 중 결과를 발표할 계획이다.

정부가 나서자 배드민턴협회 산하 실업배드민턴연맹은 문제로 지적된 신인선수 계약금·연봉상한제를 완화하고 예외 규정 신설 등을 검토 중인 것으로 확인됐다. 현행 규정은 신인선수 계약 기간의 경우 대졸 선수는 5년, 고졸 선수는 7년으로 하고 계약금은 1억5000만원과 1억원을 넘길 수 없도록 돼 있다. 또한 입단 첫해 연봉은 대졸 6000만원, 고졸 선수 5000만원이 상한액이다. 이후 3년 차까지 연간 7 이상 올릴 수 없다.

연맹은 계약기간을 단축하고 계약금과 연봉 상한액을 높이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또한 3년 차 이내 선수가 세계선수권대회 등 국제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둘 경우 인상률 제한을 면해주는 예외 조항을 만들 것으로 보인다
지난 7일 귀국한 김택규 대한배드민턴협회장이 인천공항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렇게 정부가 나설 만큼 그간 스포츠계에서 이어진 성과주의와 억압적인 ‘꼰대 문화’ 등 만연했던 고질병을 뜯어고쳐 ‘체육 강국’을 넘어 ‘스포츠 선진국’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안세영이 “제가 하고픈 이야기에 대해 한 번은 고민해주는 어른이 있길 빌어본다”며 말한 이유이기도 하다.

물론 안세영의 발언은 찬반논쟁을 불러일으켰다. 협회가 특정 선수를 위해 운영되길 바라는 이기적인 모습이라고 지적했다. 28년 전 금메달리스트 방수현은 “누가 대표팀 하라고 등 떠밀지 않았다”고 했고, 이기흥 대한체육회장은 “안세영이 하고 싶은 말이 있지만 표현 방식이 서투르고 적절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이런 발언이 얼핏 부당함에 대해 목소리를 내려는 Z세대를 권위로 무시하며 불통 행정을 일삼는 ‘꼰대 감성’이라는 비판의 목소리도 적지 않다.

그도 그럴 것이 안세영의 저격으로 그동안 방만하게 운영됐던 배드민턴협회의 민낯이 수면 위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협회는 213억원의 예산을 지원받는 등 대한체육회 60여개 가맹단체 가운데 손에 꼽힐 정도로 큰 규모를 자랑한다. 하지만 후원계약 등 자체 수입은 93억원으로 재정자립도는 46.7%에 불과하다. 40명에 가까운 임원을 두고 있으면서도 기부금 수입이 없는 점도 눈에 띈다. 대한자전거협회 등 올림픽 종목조차 아닌 단체 기부금이 1억원대에 달한다는 점에 비춰보면 아쉬운 대목이다.

배드민턴협회의 곳간이 비어있기 때문에 후원사의 입김은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 이 때문에 대표팀 선수들은 개인 후원이 아닌 협회를 지원하는 업체의 용품 사용이 강제될 수밖에 없다. 안세영은 “광고가 아니더라도 배드민턴만으로 보상을 누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며 “스폰서나 계약적인 부분을 막지 말고 풀어줬으면 한다”는 바람을 드러낸 것도 이 탓이다.

배드민턴협회의 운영은 모범 경기단체인 대한양궁협회와 여러 부분에서 비교된다. 양궁협회의 재정자립도는 81.4%에 달한다. 정의선 양궁협회장은 매년 수십억원을 지원하고 있다.
취재진에 둘러싸인 안세영 안세영이 7일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귀국하면서 취재진에게 대한배드민턴협회 관련 논란에 대한 입장을 밝히고 있다. 인천공항=이제원 선임기자
‘선수는 지도자의 지시에 복종해야 한다’는 등 강압적인 배드민턴 대표팀 운영 지침도 도마에 올렸다. 양궁협회는 복종이 아니라 ‘경기력 향상과 관련한 지시사항 이행’이라고만 적시해 놓고 있다. 안세영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선수들이 보호받고 관리되어야 하는 부분, 그리고 권력보단 소통에 대해 언젠간 이야기 드리고 싶었다”고 밝힌 배경으로 읽힌다.

대한체육회와 배드민턴협회는 해결 의지를 내비쳤지만, 이마저도 ‘어른’들의 진심이 의심되는 상황이다. 이 체육회장은 “진솔한 대화를 통해 정리할 계획”이라고 했고, 김택규 배드민턴협회장도 “갈등은 없다”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안세영 측 관계자는 세계일보와 통화에서 “협회도 체육회도 안세영에게 별다른 연락이 없다. 금메달을 축하한다는 말도 전하지 않았다”고 꼬집었다.

배드민턴협회는 선수 선발의 공정성도 양궁협회와 대비된다. 협회는 경기결과 70%와 평가위원점수 30%를 반영해 대표 선수를 선발한다. ‘복식 등에서 파트너십(60%)과 경기태도(40%)를 반영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지만 평가위원의 주관에 따라 대표팀 당락이 결정될 수 있는 구조다. 안세영이 “배드민턴에서 왜 금메달이 1개밖에 나오지 않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고 지적한 부분도 바로 여기에 있다.

반면 양궁은 철저하게 평가전 결과로 대표팀을 뽑는다. 이는 이번 올림픽에서 선전한 펜싱도 마찬가지다. 펜싱은 국내 대회 성적에 세계랭킹 포인트를 합산한 순위 등 객관적인 지표가 선발 기준이다.
지난 11일(현지시간) 이기흥 대한체육회장이 프랑스 파리 중심에 있는 코리아하우스에서 열린 2024 파리올림픽 대한민국 선수단 결산 기자회견에 참석해 파리올림픽 성과에 대해 말하고 있다. 연합뉴스
한 체육계 관계자는 통화에서 “스포츠 강국과 스포츠 선진국을 가리는 건 선수들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에서 나온다”면서 “스포츠 선진국은 선수들의 컨디션과 멘털 관리도 철저히 하는 시스템을 바탕으로 한다. 쾌적한 환경과 걸맞은 대우, 소통이 뒷받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도균 경희대 체육대학원 교수는 “안세영의 말은 신세대의 고백이라 본다. 구세대적인 사고 방식으로부터 미래 선진 사회를 위한 문제의 제기”라면서 “체육계의 아픈 상처 부위를 도려낼 것인지 근본적인 치료를 할 것인지 살펴야 한다. 선수별로, 단체별로 각자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다양한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한편 안세영 문제 외에도 이번 올림픽에서 한국 선수단의 메달이 양궁, 사격, 펜싱, 태권도 등 특정 종목에 편중됐다는 지적도 있다. 국가별로 강한 종목이 있기 마련이지만 좀더 다양한 종목에서 메달이 나와야 진정한 스포츠 선진국으로 나갈 수 있다는 목소리가 높다. 그래서 이번 대회 수영과 근대 5종 등의 종목에서 나온 동메달이 더 소중하게 다가온다.

장한서·정필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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