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물 틈조차 없던 육체·정신적 고통…전쟁 겪은 이보다 트라우마 더 많아
인권유린 폭로에 시설 폐쇄되자 “다시 열어 부랑인 갱생을” 여론
인생 절반을 고문·학대당했으나 즉각적인 치료·조처 거의 안 돼
세포 하나하나마다 남겨진 상흔 최근에야 섬유근통 진단 받거나
생계 영위 못 할 만큼 대인 기피, 성폭행 수치심에 웅크린 일평생
“국가가 직접 나서 책임져 달라”
“몇 년 전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일으켰다만, 형제복지원이라는 부랑인시설을 폐쇄시킨 바 있다. 막대한 예산을 투자해 엄청난 건물을 지었는데 오늘날까지 방치됐다. 부랑인시설을 없애 부산시내 각 역이나 유원지 같은 데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부랑인이 상당히 널려있다. 인권적 차원에서 수사 대상이 돼 편의상 시설을 폐쇄했다만, 시민의 안정적 면에서 봤을 적에는 시설을 방치할 것이 아니라 꼭 활용해야 되지 않겠나 하는 아쉬움이 있다.”(부산시의회 A 의원)
“부랑인이 부산역 등지에 상당히 많다는 말씀을 저희도 듣고 있다. 시설이 폐지됐기 때문에 그 문제를 정말 걱정하고 있다. 현재 밀양 ○○○○○에 143명 수용됐는데, 그곳은 완전히 강제구금하는 형태가 아니다. 자기가 원하면 나오는 형태다. 그렇기 때문에 수용하더라도 다시 나오는 일을 반복하는 아주 곤란한 처지에 놓였다. 그래서 시설도 이번에 확장하고 우선 임시보호소라도 완벽하게 하나 지어 다소 강제가 되는 방향이 되더라도 일부 강제수용하는 방법으로 추진 중이다.”(시 보건사회국장)
형제복지원 폐쇄 4년 만인 1991년 7월 24일. 부산시의회 문교사위원회에서 시설 활용 방안이 논의됐다. 형제복지원은 인권유린 실태가 검찰 수사로 폭로되면서 1987년 사실상 폐쇄됐다. 한때 3100여 명에 이르던 수용인들이 시설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거리에 부랑인이 넘친다는 ‘우려’와 시설을 부랑인 사회 복귀의 장으로 다시 써야 한다는 ‘진단’이 나왔다. 다시금 이들을 강제로 쓸어 담아 갱생시키자는 거다. 부랑인을 향한 당대의 인식이었다. 복지 전문가도 예외는 아니었다. 질의를 던진 A 의원은 부산사회복지협의회장 출신이다.
‘부랑인’으로 뭉뚱그려진 사회적 불안에 높으신 분들이 골머리를 싸맸다. 박인근 원장의 악마적 행태에 분노하면서도 시설 자체는 필요악으로 봤다. 그만 없다면 순기능을 찾으리라 봤다. 대형화한 수용시설은 필연 무간지옥이 된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 사이 피해생존자의 상처는 몸과 정신 깊숙이 곪아갔다. 벌어진 상처 속 그날의 끔찍한 기억이 괴물처럼 입 벌려 피해자의 삶을 잡아 먹어갔다. 괴물과 마주하지 않으려면 상처를 봉합해야 했다. 그러나 국가와 사회는 오랜 시간 이들의 상처를 방치했다. 상처에 잡아먹힌 피해자는 심신의 ‘골병’으로 신음했다.
“제 병이요. 겁에 질려서 두려움과 긴장 속에 있으면 신경에 변화가 오면서 걸린대요. 신경 자체가 조직 단위에서 바뀐대요. 늘 ‘언제 또 맞을까, 일찍 맞고 속 편하게 자면 좋겠다’ 생각했어요. 쟤네(시설 관리자)가 기분이 안 좋다 그러면 ‘원산폭격’부터 해서 ‘나룻배’며 ‘비행기’ 태우고…. 긴장 속에 사는 거예요.”
홍성정(57) 씨의 몸엔 작은 세포 하나마다 상흔이 남겨졌다. 할큄의 흔적은 눈에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왜 통증에 시달리는지도 모른 채 수십 년을 견뎠다. 온몸이 못에 찔리는 듯한 고통에 약 없이는 밤잠을 청하지 못했다. 2010년께가 돼서야 ‘섬유근통’ 진단을 받았다. 이 병에는 뚜렷한 원인이 없었다. 의사는 높은 수준의 스트레스가 원인일 거라 조심스럽게 짐작했다. 그러나 홍 씨는 단박에 발병 원인을 지목할 수 있었다. 인생의 절반가량을 집단수용시설에 갇혀 지낸 그였다. 그곳에서 당한 고문과 폭력, 밤낮 가리지 않는 위협밖에 이유가 없었다.
홍 씨뿐만이 아니다. 수용시설 피해생존자 중 ‘골병’이 없는 이는 드물다. 그곳에서 너무 맞아 수십 년이 지나도 통증이 가시지 않는다고 호소한다. 뚜렷한 직접 계기 요인을 지목할 수 없어 골병이라 칭하지만, 인과는 명백하다. 어린아이의 신체에 가해진 폭력이 기한 모를 후유증을 심은 것이다. 수용시설 피해자를 대상으로 진행된 유일한 연구 ‘부산시 형제복지원 사건 피해자 실태조사’를 보면 후유증이라 진단된 신체 질환 말고도 피해자들은 만성화한 통증을 수시로 겪었으며, 근골격계 질환(48.3%)을 앓는 이가 가장 많았다.
골병은 생계까지 잠식한다. 택시 운전사인 홍 씨는 통증 탓에 운전대를 잡지 못하는 날이 허다하다. 영화숙과 형제복지원에서 골병을 얻은 박상종(67) 씨는 젊을 적 선원이나 배관공으로 일할 때 1년 이상 일해본 적 없다. 이 때문에 생업에 게을러 본 적 없는데도 국민연금 납부 기간을 다 채우지 못했다. 박 씨는 “골병을 앓으니 일을 못 하는 게 고민됐다. 몸이 아파 쉬어야 하고, 경력도 못 쌓아 임금이 안 올랐다. 육십까지도 국민연금을 다 못 채웠다”고 토로했다.
홍 씨는 당대 집단수용시설 대부분을 경험했다. 서울시립아동보호소를 필두로 형제원 영화숙 선감학원 등 오늘날까지 악명이 전해지는 시설에서 10년 이상을 보냈다. 예닐곱 살이던 1970년대 어느 날 낯선 아줌마 손에 이끌려 남대문경찰서로 간 뒤 그의 인생은 지옥 구렁텅이에 빠졌다. 기합을 빙자한 고문, 정신 확립을 핑계로 한 폭력에 시달리며 탈출과 단속을 거듭했다.
그는 수용시설을 누구보다 잘 안다. 어느 곳이든, 원장이 누구든, 시설은 죄다 똑같은 지옥이라는 진실을 자신의 삶으로 깨우쳤다. 군사정부 들어 국가는 부랑인 단속·수용을 크게 늘렸다. ‘사회정화’라는 명분에서 자행된 불법 감금이었다. 국가의 비호와 후원 아래 부랑인 시설은 점차 대형화했다. 수백수천의 아동을 관리하게 된 시설은 잔혹한 폭력과 비인간적 규율로 아동을 다스렸다. 이른바 군대식 통제다. 불어난 머릿수를 통솔하는 방법 중 가장 손쉽고 값싼, 원시적 수단이었다. 국가부터 공포 정치로 국민을 통치한 시대다.
“잡혀 오는 방식이나 구타, 기합이 다 똑같은 거야. 고통 속이라고. (외부단체가) 간식 주고 가도 반장이나 실장한테 뺏기고. 다른 거라곤 서울에선 ‘원산폭격’이라 부른 기합이 부산에선 다른 말로 불렸다는 거 정도지. 형제원에선 심한 폭행을 당해 예수병원에 실려 갔다가 간호사 도움으로 탈출했는데 또 영화숙에 잡혀 나보다 훨씬 덩치 큰 여자한테 빗자루로 두들겨 맞고, 사람을 통째로 집어 던지는 ‘광대’ 당하고 했어요. 그러니 맞는 것밖에 기억이 안 나요.”
수용인의 삶은 전쟁만큼 가혹했다. 시 형제복지원 피해자 실태조사에 따르면 피해자들의 ‘복합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CPTSD)’ 현재 잠재 유병률은 23.5%다. 이는 우간다 내전을 겪은 피해자의 CPTSD 유병률(20.8%)보다 높다. 형제복지원 사건이 터진 뒤 즉각적인 치유 조처가 뒤따랐다면, 전국 집단수용시설 수용인의 상태를 두루 살폈다면 사정이 나아졌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시절 사회는 수용인의 신체·정서적 회복보다는 ‘거리 정화 기능’ 회복에 관심을 쏟았다. 2012년 광주트라우마센터 등이 생기기 전까지 피해자는 완전한 방치 상태였다.
“지금도 말하기가 참 불편해. 얘기를 할 수가 없네요. 그, 성적 학대라고 그러나요? 인격적으로 완전히 밑바닥을 맛봐야 했던 시대고…. 주변 사람이나 가족한테도 숨겨왔고, 나 자신한테도 기억날 일 없게 피해 왔던 일이잖아요.”
트라우마는 백성훈(가명·61) 씨의 어릴 적 기억을 날려버렸다. 그는 대여섯에 서울시립아동보호소로 붙잡혀 갔다. 가족·친척과 살던 집이며 동네 정취는 떠오르지만 동네 이름을 도저히 기억해 낼 수 없었다. 고등학생 무렵 ‘경기도 연천에서 군 생활을 했다’는 미술 선생님의 우연한 말씀을 듣고서야 고모 집이 연천이었다는 사실이 번쩍하고 생각났다. 잊었던 단어가 충격요법처럼 다가온 셈이었다. 그 뒤로 한참 ‘이산가족’을 찾아 헤맸다. 20년 만에 가족을 찾고서야 백 씨는 경기 장호원이 고향이며 연천은 부모님을 여의고 맡겨진 친척집임을 알았다.
트라우마는 역설적이었다. 잊고 싶은 기억만큼은 꽉 붙들었다. 떨치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는 최악의 순간들이 날카로운 파편처럼 그의 머릿속을 베고 할퀴었다. 친척집마다 떨어져 살게 된 형을 찾아 연천에서 기차를 타고, 환승역을 몰라 서울 청량리역에서 배회하다 단속당하고, 서울시립아동보호소로 끌려갔다가 반년 만에 연고도 없는 부산 영화숙으로 옮겨진 일. 그곳에서 일상다반사처럼 방망이로 얻어맞고, 배가 고파 음식물 쓰레기를 뒤적이고, 몰매에 개죽음당한 아이가 뒷산에 묻힌 일. 50여 년이 흐른 지금도 백 씨는 기억 행위 자체를 주저한다.
특히나 그를 괴로움에 빠트리는 건 성적 학대다. 또래 중에서도 유독 마르고 왜소했던 그는 몹쓸 일에 휘말렸다. 마리아수녀회가 운영한 부산 소년의집으로 옮겨지기 전까지, 그는 어쩔 도리 없이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세월이 약이다 생각하며 버티고 살았습니다. 소년의집에서 인생 전환점을 맞지 않았다면 어떻게 살게 될지 장담 못 했죠. 지금은 많이 극복했지만, 여전히 그때 일을 떠올리는 건 불편하고 힘듭니다.”
시설에서 피해생존자의 존엄은 벼랑 끝으로 내몰린다. 어떤 경험은 그들이 옛 기억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는 계기적 사건으로 커져 평생을 따라붙는다. 피해생존자의 정서적 평온을 수시로 위협하며 찔러댄다.
‘태권도’(59)가 선감학원에서의 일을 숨기고 살아온 까닭이다. 그 역시 어릴 적 기차를 잘못 타 역 근처를 돌아다녔다는 이유로 수용됐다. 처음 붙잡힌 시설은 목포 ‘자활원’이었다. 정자세로 앉지 않으면 당수를 맞는 생활에 기겁해 탈출, 서울로 갔다. ‘태권도’는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단속원에 붙들려 서울시립아동보호소에 보내졌다. 그 뒤 탈출과 단속, 전원을 반복했다. 부산 형제원, 경기 선감학원, 대전 성지원 등 여러 시설을 전전했다. 형제원 수용 당시 태권도복을 입고 있던 터라 별명이 ‘태권도’가 됐다.
아비규환의 저승에 떨어진 것과 다를 바 없는 나날이었다. 형제원에선 낚시 바늘을 만드는 작업반에 투입돼 수도 없이 손가락을 찔렸다. 작업 속도를 맞추지 못하면 어김없이 주먹이 날아들었다. 성지원에선 아예 공장에 갇혀 6개월을 살았다. 작업반장의 감시 아래 장갑이나 신발을 봉제했다. 노임은 적금해주겠다고 했으나 한 푼도 받지 못했다. 훗날 성지원은 1987년 형제복지원과 함께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다. 1998년엔 성지원을 소유한 법인 ‘천성원’ 산하 부랑인시설 ‘양지마을’에서 재차 대규모 인권침해가 자행된 사실이 드러났다.
숱한 고통 중에서도 가장 두려웠던 건 선감학원에서의 “공포와 수치의 밤”이었다. ‘한강철교’ 등의 고문, 양잠 뽕잎을 따거나 잔디를 다듬는 노역이 문제가 아니었다. “당시 ‘창조사’란 반에 있었어요. 반장 별명이 ‘강탄’인지 ‘광탄’이었어요, 하루는 반장이 친절히 잘 해주면서 산에 돌배 따러 데려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돌변해선 돌로 머리·어깨를 찍고, 주먹으로 때리면서 ‘말 안 들으면 죽인다. 바지 내리고 엎드려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성폭행하곤 ‘사감에게 입 벌리면 죽인다’고 겁줬습니다. 그 후 새벽마다 성폭행과 성추행을 저질렀습니다.”
‘태권도’는 이때의 기억 탓에 지금도 남자들끼리 같은 방을 쓰지 못한다. 생계를 위해 공장 합숙 생활을 해온 터라 고충이 컸다. 외톨이로 전락하기에 십상이었다. 우울증과 대인기피증이 뒤따랐다. 그는 “사회에 나가서도 수치심 때문에 웅크린 삶을 살아야 했다”고 토로했다.
수용인의 신체·정서적 상처는 아물 틈이 없었다. 커져가는 골병이 삶의 평온을 집어삼켰다. 문제는 남몰래 숨겨온 상처를 어렵사리 드러내 치유를 호소하더라도, ‘뒤늦게 나타났다’며 피해 사실을 공인받지 못하는 이가 산적했다는 점이다. 공식 조사 기간에 피해사실이 확인된 이들 외에는 아무런 치유 수단을 제공받지 못한다. ‘태권도’ 역시 이 경우에 속한다. 자신의 피해를 입증하고자 보관한 여러 자료가 현재로선 낡은 서류에 불과하다. 그는 “제때 조사를 못 받았다고 해서 그 시절 겪은 수치를 묻고 살 수는 없다. 국가의 책임 조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 피해자가 말하는 ‘상처’
온몸이 못에 찔리는 듯한 고통에 약 없이는 밤잠을 청하지 못했죠. 2010년께가 돼서야 ‘섬유근통’ 진단을 받았습니다. 이 병에는 뚜렷한 원인이 없었죠. 저는 압니다. 그곳에서 당한 고문과 폭력, 밤낮 가리지 않는 위협밖에는 이유가 없었습니다. -57세 홍성정 씨
또래 중에서도 유독 마르고 왜소했습니다. 몹쓸 일에 휘말렸죠. 어쩔 도리 없이 고통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세월이 약이다 생각하며 버티고 살았습니다. 여전히 그때 일을 떠올리는 건 불편하고 힘듭니다. -61세 백성훈 씨
하루는 반장이 친절히 잘 해주면서 산에 돌배 따러 데려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돌변해선 돌로 머리·어깨를 찍고, 주먹으로 때리면서 ‘말 안 들으면 죽인다. 바지 내리고 엎드려라’고 했습니다. -59세 태권도 씨
영상= 박세종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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