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상처 남긴 ‘5월 투쟁’…위기 몰린 노태우 정권 반격 나서

한겨레 2024. 8. 12.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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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찾아서-박래군의 인권의 꿈] 15화 분신 정국(하)
1991년 5월19일 강경대 장례행렬이 광주 진입하는 인터체인지에서 경찰과 대치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1991년 4월26일부터 5월4일까지 열흘 동안 연이은 대학생들의 분신과 사망은 그 시기를 살았던 모두에게 큰 충격이었다. 그렇지만 이때까지의 충격은 1991년 5월 분신정국의 서막에 불과했다. 5월5일 “죽음 굿판을 걷어치워라!”는 제목의 김지하 칼럼이 조선일보에 실렸다. “지금 곧 죽음의 찬미를 중지하라. 그리고 그 굿판을 당장 걷어치워라 (…) 지금 당신들 주변에는 검은 유령이 배회하고 있다. 그 유령의 이름을 분명히 말한다. 네크로필리아 시체선호증이다. 싹쓸이 충동, 자살특공대, 테러리즘과 파시즘의 시작이다.”

대표적인 저항시인이었던 김지하의 칼럼이라니. 너무도 일방적인 공격이었다. 대학생들의 사망을 불러온 노태우 정권의 폭압정치, 공안통치에 대해서는 한마디 언급도 없었다. 그러잖아도 계속되는 분신으로 누구보다 가슴 아팠던 유가족들은 엄청난 충격에 빠졌다. ‘시체선호증’이라니? 이건 지독한 배신이었다. 유가협은 즉각 규탄 성명을 냈다.

1991년 5월5일 “죽음의 굿판 걷어치워라!”는 제목의 김지하 칼럼이 조선일보에 실렸다.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김지하의 칼럼이 던진 충격

김지하 시인의 칼럼 발표 다음날인 5월6일 새벽에는 안양병원에 입원해 있던 박창수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이 사망했다. 서울구치소 수감 중에 부상을 당해서 안양병원에 입원해 있었는데, 그의 죽음 과정은 의문 투성이었다. 그의 죽음에는 안기부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수감 중인 그에게 안기부는 한진중공업 노동조합이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에서 탈퇴할 것을 집요하게 종용했다. 교도관들이 감시하는 병원에서 그가 옥상까지 올라가 투신, 자살했다고 하는 경찰의 발표도 믿을 수 없었다. 다음 날인 5월7일 저녁 7시에는 안양병원에서 노태우 정권 규탄집회가 열렸다. 경찰은 집회가 끝난 뒤 백골단과 전경 22개 중대를 투입해 영안실 벽을 뚫고 시신을 탈취해갔다.

1991년 5월7일 ‘의문의 투신’으로 숨진 박창수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의 주검이 안치된 영안실에 무장 경관들이 콘크리트 벽을 뚫고 난입하자 유가족들이 격렬하게 저항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5월8일 오전 8시7분, 서강대에서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이 분신, 자결했다. 그러자 서강대 박홍 총장(신부)은 기자들 앞에서 성경에 손을 올리고, “죽음을 선동하고 이용하려는 반생명적인 어둠의 세력이 있다”고 말했다. 이 사건은 위기에 몰렸던 노태우 정권에게 반격의 빌미를 제공했다. 언론을 통해 운동권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가 이어졌다.

그런 중에도 ‘백골단 해체, 민자당 해체, 노태우 퇴진’을 주장하는 투쟁은 고조되고 있었다. 5월4일에는 20만명, 5월9일에는 30만명, 5월18일에는 전국 81개 지역에서 40만명이 시위에 참여했다. 국민대책회의가 주도한 시위는 서울에서 전국으로, 대학생에서 노동자, 농민, 빈민, 지식인 등으로 퍼져 갔다. 제2의 6월 항쟁이 올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공안탄압에 짓눌려 있던 민주운동진영이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의 조직 동원력에 힘입어서 6공화국 이후 최대의 시위를 이끌고 있었다.

그렇지만, 5월14일 연세대학교에서 출발한 강경대 장례행렬은 아현동 고개를 넘지 못했다. 1987년 이한열 장례식 때처럼 서울시청 광장에서 시민들이 참여한 노제를 지내려던 범국민대책위원회의 계획은 이화여대역 앞 도로를 차단한 경찰의 차벽에 막혔다. 경찰은 이날 쓰레기차를 동원해서 도로를 차단했다. 전대협 전투조들이 차벽을 무너뜨리려고 애썼지만, 육중한 차벽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5월18일, 광주민중항쟁 11주기에 2차로 강경대 장례행렬이 연세대를 출발했지만, 이번에는 공덕동 로터리에서 경찰에 막혔다. 서울시청으로 가는 길을 포기하고 광주로 직행해야 했다. 광주에서는 경찰의 저지선을 뚫고 금남로 노제와 망월동 묘역 안장까지 해냈다. 광주의 힘이었다.

차벽에 막힌 장례행렬

이날 장례행렬이 연세대 정문을 나선 뒤 바로 연세대 정문 앞 굴다리에서 이정순씨가 몸에 불을 붙이고 떨어져 사망했다. 나는 행렬의 뒤를 따라나서다가 소식을 듣고 현장으로 달려갔다. 주위 사람들이 불을 끄고 난 뒤였지만 그녀는 절명했다. 나는 광주로 가는 걸 포기하고 다시 세브란스병원 영안실로 돌아왔다. 39살의 여성이었던 그는 유서에서 “백골단 해체, 군사독재 물러가시오”라고 썼다. 천주교 신자였던 그의 장례를 천주교 단체 분들과 함께 준비하여 치러야 했다. 이정순, 윤용하, 정상순 같은 평소 활동하던 조직이 없는 시민이 분신해서 죽는 경우는 장례를 치르는 비용 마련도 어려워서 간소하게 지내야 했다.

계속되는 열사들의 죽음과 장례에 나는 지쳐가고 있었다. 당시 나는 초조했던 것 같다. 제2의 6월항쟁으로 발전시켜야 한다는, 그래야 열사들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을 거라는 일종의 강박이 있었던 것 같다. 생각만큼 투쟁이 시민 항쟁으로까지 진전되지 않으면서 나의 무력감도 커졌다. 이화여대 앞 도로를 가로막았던 거대한 차벽이 상징하는 것처럼 권력의 힘은 막강했다. 노태우 정권은 관계기관대책회의를 수시로 열면서 범국민대책회의를 비롯한 운동권을 부도덕한 폭력집단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5월18일 전후 노태우 정권은 5월 투쟁 지도부들에 대한 수배령을 내리고 공개수사를 하면서 압박했다. 범국민대책회의는 연세대학교를 떠나서 명동성당에서 농성에 들어갔다. 이때의 국민대책회의 명칭은 ‘공안통치 분쇄와 민주정부 수립을 위한 범국민대책회의’로 변경했다. 명칭으로는 투쟁 수위가 한 단계 높아졌지만, 시민들은 계속되는 분신과 거리시위에 등을 돌렸다. 거기에는 당시 언론들의 총공세가 한몫했다.

특히 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의 유서를 같은 조직의 총무부장 강기훈이 대필했다는 검찰의 발표를 언론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과장, 확대했다. 운동권은 목적을 위해서라면 동료의 목숨마저 이용하는 부도덕한 집단이라며 낙인을 찍었다. 이 사건은 강기훈 개인만이 아니라 민주운동진영 전체를 매도하는 일이었다. 나도 미칠 것만 같았는데, 점점 말도 안 되는 조작극이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는 분위기였다. ‘기레기’는 그때도 ‘기레기’였다.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으로 불린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사건’의 전모는 24년 뒤에 드러나게 된다. 이 사건은 나중에 자세히 다룰 생각이다.

5월25일, ‘폭력살인 민생파탄 노태우 정권 퇴진 제3차 국민대회’에서 성균관대생 김귀정이 경찰의 토끼몰이 진압으로 사망하게 된다. 김귀정은 유가협 장터에서 만난 여학생이었다. 그 소식을 듣고 나는 곧장 시신이 안치된 백병원 영안실로 들어갔다. 중앙시장에서 노점을 하던 그의 어머니, 김종분 씨가 소식을 듣고 달려와서 딸의 시신을 부여잡고 통곡했다. 유가협 부모님들이 김귀정 어머니를 끌어안고 함께 울면서 눈물바다가 되었다.

1991년 6월11일 오후 비가 내리는 가운데 발인식을 마친 김귀정 운구행렬이 백병원을 떠나 모교인 성균관대 입구에 도착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백병원 영안실을 지켜라

검찰은 김귀정의 시신을 부검하겠다고 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이것만은 막아야 했다. 백병원 영안실은 도로변에 있었다. 셔터 하나만 열면 바로 도로였다. 동이 트기도 전에 백골단이 최루탄을 쏴대면서 쳐들어왔다. 셔터 안의 우리는 불안했다. 최루탄 터지는 소리가 가슴을 옥죄였고, 돌이 날고, 쇠와 쇠가 격렬하게 부딪히는 날카로운 소리가 어지럽게 들렸다. 방어선이 뚫릴 것만 같았다. 그런데 백병원을 지키던 성균관대생들은 경찰의 공격을 한 차례, 두 차례, 세 차례나 싸워서 물리쳤다. 대단한 싸움이었다. 공권력에 의해서 여대생이 사망한 사건이었지만, 국민들의 분노는 다시 살아나지 않았다.

6월3일,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국무총리 서리로 임명된 정원식의 고별 강연이 예정되어 있었다. 정원식은 문교부(지금 교육부) 장관 시절 전교조 교사들을 대량해직시킨 장본인이었다. 그런 그가 노태우 정권의 국무총리가 된다고 하니 학생들은 그를 용서할 수 없었다. 학교에 나타난 정원식에게 학생들은 밀가루와 계란을 던졌다. 밀가루와 계란 범벅이 된 모습이 언론에 가감 없이 보도되었고 학생운동 세력은 스승마저 테러하는 ‘패륜집단’으로 매도되었다.

그해 6월20일에 시행된 광역의회 선거에서 여당인 민자당이 압승했다. 6월24일, 명동성당에서 결백을 주장하며 버티던 강기훈이 검찰에 출두하고, 6월29일 범국민대책회의 지도부는 명동성당을 떠났다. 7월1일 박창수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 장례식이 치러졌다. 1991년 5월 분신정국은 깊은 상처를 남긴 채 막을 내렸다.

박래군 | 36년째 인권운동가로 살고 있다. 유가협, 인권운동사랑방, 인권재단 사람을 거쳐서 현재는 4·16재단 운영위원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 ‘상처는 언젠가 말을 한다’ ‘우리에겐 기억할 것이 있다’ ‘사람 곁에 사람 곁에 사람’, 공저서 ‘이따위 불평등’ ‘새로고침’ ‘살아남은 아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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