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희의 정치사기] 안세영 폭발과 체육계 시대착오

김세희 2024. 8. 12.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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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희 정치정책부 기자
2024 파리올림픽 배드민턴 여자 단식에서 금메달을 차지한 안세영이 7일 오후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귀국하며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연합뉴스>

"국민이라는 것은 그 혈통, 역사, 거주, 종교, 언어의 동일함 이외에는 역시 반드시 동일한 정신을 가지며 동일한 이해(利害)를 느끼며 동일한 행동을 하고, 그 안에서의 조직은 안 몸의 골격과 같고, 그 밖에서 발휘되는 정신이 한 군대와도 같은 것이다. (중략) 우리들은 사회에 입각하여 사회에 헌신하여 각 개인의 능력대로 국가와 민족의 목적을 위해서 협동하여야 하며, 독단적 생활을 하지 말아야 한다." 1904년 베델과 양기탁이 창간한 대한매일신보에 실린 '민족과 국민의 구별'의 일부다.

이 글에서 국민은 자율성이 없다. 정신적으로 통합을 강요받으며, 개인의 능력도 국가와 사회를 위해 써야 한다. 물론 외세 침략과 국권 상실이라는 초비상의 환경이 자리한다. 현실적으로 국가와 사회를 위한 개인의 복종과 희생을 강요받을 수밖에 없다. 대한매일신보가 항일적 경향의 계몽주의 신문이니 충분히 국가주의적 어조로 민중을 동원하려는 것은 이해가 된다.

다만 평화의 시대가 도래하면 이런 논리는 폭력이 될 수 있다. 불필요할 정도로 개인을 집단에 종속하고, 다양한 사고와 언행을 억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1906~1975)가 분석했던 '총체적 지배'를 구축한 전체주의 정권과 다르지 않다. 총체적 지배는 무한히 많고 다양한 인간들을 마치 '한 사람'(One man)인 것처럼 조직하는 것이다.

2024 파리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안세영과 갈등을 빚고 있는 배드민턴 협회가 내세우는 논리도 다르지 않다.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소속 강유정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협회로부터 제출받은 '국가대표 운영 지침'을 보면, 선수들이 따라야 하는 규정으로 '지도자의 지시와 명령에 복종', '담당 지도자 허가 없이는 훈련 불참·훈련장 이탈 불가' 등이 적시돼있다. 요약하자면 지도자의 모든 지시와 명령에 따라야 한다는 조항이다. 시대착오적이고 반인권적이다.

안세영의 이의 제기에 대응하는 태도에서도 이런 폭력의 논리는 반영된다. 안세영이 미흡한 부상 관리와 '구닥다리' 시스템을 지적하자, 협회는 이것을 특혜로 규정한다. 그런 가운데 협회는 서울에서 1100만원을 들여 한의사를 모셔왔다는 등 생색을 내고, 심지어 "우리는 손흥민-김연아의 눈높이에 맞춰 줄 수 없다"는 말까지 흘린다. 세금으로 운영되는 대표팀에서 단독행동은 안 된다는 발언도 곁들인다.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처사다. 부상을 심하게 당한 국가대표 선수가 경기를 잘 치를 수 있도록 치료하는 건 당연하다. 어떻게 그것을 특혜로 볼 수 있는가. 다른 선수들은 부상을 당해도 협회가 해주는 데로 '입 닥치고' 고스란히 따랐으니, 안세영도 무조건적인 복종과 희생만 해야 한다는 것인가. 전쟁 중에 '부상병'이 최우선 '케어 대상'이라는 것은 상식이다. 협회가 그 상식을 깰 권한은 없다. 여전히 협회는 1900년대 사고를 하고 있다.

한 가지 더 따지고 싶다. 과연 손흥민 김연아 정도의 위상을 갖고 있지 않다면, 부조리에 대한 이의 제기조차 할 자격이 없는지 알고 싶다. 그런 논리라면 오히려 협회는 안세영의 말 한 마디에 고개를 조아리고 천금같이 받아들여야 한다. 28년 만에 올림픽 여자 단식 배드민턴 금메달을 가져다 준 귀인이니 말이다.

이기흥 대한체육회 회장의 발언도 상식을 벗어난다. 그는 안세영이 협회와 계약한 용품회사의 신발이 발에 안 맞아 불편하다고 말한 것에 대해 "이용대 등 국제적으로 기량있는 선수들을 배출했는데 아직 그런 컴플레인은 한 번도 없었다"고 말했다. 안세영이 유난을 떤다는 뉘앙스다.

여태까지 아무런 이의 제기가 없다고 해서 그것이 옳은 것인가. 그 동안 '꼰대적 사고'나 전체주의적 통제가 얼마나 만연했는 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개별 선수마다 발 사이즈와 신체적 조건은 다르다. 선수 모두가 같은 조건을 가진 신발을 신을 수 없다. 신발이 자신과 맞지 않으면 신경이 쓰여 경기를 망칠 수도 있다. 대표팀에만 들어가면 불편한 신발로 바꿔 신어야 했던, 안세영이 선수로서 당연히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한 것이다. 일반인도 운동을 할 때, 자신의 신체적 조건에 맞는 신발을 고른다.

논쟁은 이쯤 해두고, 모든 문제를 원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불행 중 다행인지 정부와 정치권이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나섰다. 문체부는 12일 보도자료를 통해 논란이 된 미흡한 부상관리, 대회 출전 강요 의혹 등 총체적인 조사를 실시하다고 밝혔다. 특히 사격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출신인 진종오 국민의힘 의원이 안세영의 폭로를 계기로 '체육계 비리 국민제보센터'를 개설·운영한다고 밝힌 점은 환영할 만하다. 두 주체가 이번 만큼은 잘해주길 기대한다.

이번 문제 제기를 도약의 발판으로 삼기 위해선 배드민턴 협회를 비롯한 체육계의 부조리가 개선돼야 한다. '환골탈태'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모든 것을 바꿔야 한다. 정치정책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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