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포럼] 러시아의 알박기 외교

김병호 기자(jerome@mk.co.kr) 2024. 8. 12.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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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우리 외교 아킬레스건의 실체를 명확히 파악했다.

두 달 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방북 결과를 놓고 우리 측 항의와 민감한 반응은 결과적으로 '북한을 매개로 한국 흔들기'가 유효함을 거듭 확인시켜줬다.

현승수 통일연구원 연구위원은 지난달 북·러 관련 세미나에서 "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났다고 러시아가 북한을 포기하고 한국에 더 힘을 쏟을 것이라는 생각은 오판"이라고 했다.

러시아가 북한을 숙주 삼아 우리를 겁박할 개연성이 커진 만큼 우리 외교 행태도 달라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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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서방국에 친러 거점 두고
러시아, 간섭과 전쟁도 감행
對北 약점 지렛대로 활용해
韓 흔드는 유사전략 막아야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우리 외교 아킬레스건의 실체를 명확히 파악했다. 북한만 쥐고 있으면 언제든 한국을 흔들 수 있다는 약점을 찾은 것인데 완전히 새로운 개념은 아니다. 러시아가 한동안 잊고 지냈거나 동북아시아 문제를 중국에 맡긴 채 사용하지 않았을 수 있다. 두 달 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방북 결과를 놓고 우리 측 항의와 민감한 반응은 결과적으로 '북한을 매개로 한국 흔들기'가 유효함을 거듭 확인시켜줬다.

이 점이 껄끄러운 이유는 러시아 외교의 중요한 한 축이 친러시아 거점을 통한 세력 확장이기 때문이다. 친러 지역이 있는 나라들은 이것이 약점이 돼서 러시아를 상대로 힘을 쓰지 못한다. 2008년 발발한 조지아 전쟁은 친서방 정책을 펴던 조지아 정권에 대한 경고였다. 조지아 내부 친러시아 자치공화국이던 압하지야와 남오세티야가 동원됐다. 전쟁 전부터 러시아는 이들 공화국에 자금과 무기를 대주며 조지아의 국가통합 노력을 좌절시켰다. 종전 후 두 공화국은 러시아 승인 속에 독립했고, 조지아는 친서방과 친러 노선을 두고 내분에 휩싸였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한때 공격 대상이 됐던 몰도바에도 친러 공화국(트란스니스트리아)이 있다. 그곳에는 평화 유지 명분으로 러시아군이 주둔 중이다. 몰도바 정부가 러시아 말을 듣지 않으면 이 군대를 동원해 정부 전복과 공화국 독립이라는 암묵적 위협을 가한다. 캅카스 지역의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가 영유권 분쟁 중인 나고르노카라바흐는 러시아 입김에 따라 실질적 주인이 바뀌는 곳이다. 러시아는 자국에 맞서는 아제르바이잔을 겨냥해 아르메니아를 편 들며 그곳에 친러 자치공화국(아르차흐) 수립까지 용인했다. 하지만 지난해 아제르바이잔은 대규모 공습으로 나고르노카라바흐를 장악했고 아르메니아인들이 대거 피난하면서 아르차흐는 해체됐다. 일각에서는 국제사회 제재를 받는 러시아가 아제르바이잔을 통해 물자들을 우회 공급받으면서 아르메니아를 버렸다는 분석도 나온다.

우크라이나에서도 러시아는 자국계가 많은 크림반도와 우크라이나 동부에서 반정부 활동을 선동해 서방 편에 선 키이우 정부를 압박해왔다. 그것이 안 되자 2014년 크림반도에 쳐들어갔고 지금도 우크라이나 전역에서 전쟁 중이다.

최근 북·러 밀월 속에 우리가 처한 상황은 러시아한테는 매우 익숙한 장면이다. 러시아와 가까운 북한을 매개로 한국을 통제하려는 외교 기제가 옛 소련 밖에서도 적용될 첫 사례다. 우리가 러시아의 대북 군사기술 제공 가능성에 경기 어린 반응을 보일 때마다 러시아가 속으로 미소 짓는 이유다. 현승수 통일연구원 연구위원은 지난달 북·러 관련 세미나에서 "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났다고 러시아가 북한을 포기하고 한국에 더 힘을 쏟을 것이라는 생각은 오판"이라고 했다. 종전 후에도 푸틴은 북한 활용책을 지속할 것이란 얘기다.

러시아가 옛 소련 곳곳에서 해온 '알박기 외교'가 외부로 유일하게 확산된 곳이 한반도라는 점은 불편한 일이다. 5000만명 넘는 인구와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이 그런 재수 없는 상황에 놓였다는 것 이 서글프기도 하다. 러시아와 북한을 이웃으로 둔 숙명이다. 하지만 체념만 하고 있어선 안 된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우리에게 시련도 줬지만 주변 4강 위세에 눌려 관행화된 순응적 외교를 깰 기회도 된다. 북·러와 서방이 지향하는 가치의 차이가 전쟁을 통해 분명해진 마당에 우리는 자연스럽게 서방과의 연대에 무게를 둘 수밖에 없다. 러시아가 북한을 숙주 삼아 우리를 겁박할 개연성이 커진 만큼 우리 외교 행태도 달라져야 한다. 전략적 모호성을 내세워 원칙 없이 이쪽저쪽을 오가면 '알박기 외교'의 희생양이 될 뿐이다.

[김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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