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주 임신중지 브이로그’가 남긴 질문…정부는 ‘처벌 촉구’ 말고 뭘 했나
경찰이 이른바 ‘36주 임신중지 브이로그’ 영상을 올린 A씨와 그가 임신중지 수술을 한 병원의 병원장을 피의자 신분으로 입건했다고 12일 밝혔다. 지난 6월 A씨가 임신 36주차에 임신중지 수술을 받았다며 유튜브에 ‘총 수술비용 900만원, 지옥 같던 120시간’이라는 제목의 영상을 올리면서 시작된 논란이 형사 처벌을 염두에 둔 경찰 수사로 이어진 것이다.
서울경찰청 관계자는 이날 서울 종로구 서울경찰청에서 열린 출입기자단 정례회견에서 “(해당 영상을 올린) A씨는 비수도권에 거주하는 20대 여성으로, A씨에 대한 조사를 2차례 진행했고, 임신 중지 사실을 인정한 상태”라며 “A씨의 수술을 담당한 병원은 수도권 소재의 병원으로 압수수색한 결과 태아는 현재 생존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경찰은 A씨가 올린 해당 영상의 진위 여부에 대해선 “조작된 부분은 없었다”고 했다. A씨가 영상을 통해 주장한 내용이 대부분 사실로 확인됐다는 취지다.
2019년 헌법재판소의 헌법불합치 판단 이후 낙태죄가 폐지되면서 임신중지는 불법이 아닌 상태다. 이 때문에 보건복지부는 A씨와 해당 병원을 경찰에 수사의뢰하면서 살인 혐의를 적용법률로 들었다. 복지부는 임신중지 시술로 산 채로 태어난 34주 태아를 살해한 의사에게 살인 혐의 유죄가 확정된 2021년 법원 판례를 염두에 둔 것으로 전해졌다. 이 때문에 경찰은 태아가 모체에서 나올 당시 ‘살아있었나, 죽어있었나’를 밝히는 데 수사력을 집중하고 있다.
임신 주수를 불문하고 임신중지 시술이 이뤄지고 있다는 현장의 목소리는 그간 무수했다. 하지만 복지부가 후기 임신중지 사례에 수사를 의뢰한 것은 이번이 처음인 것으로 알려졌다. 복지부가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제도 마련에 나서야 한다는 요구에는 귀를 닫고 있다가 후기 임신중지라는 이유로 처벌 카드를 꺼낸 것은 직무유기이자 선택적 행정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36주 임신 중지’ 처벌 가능할까
임신중지 수술을 한 의사에 살인죄가 인정되려면 태아가 ‘살아서 태어났다’는 것을 수사기관이 증명해야 한다. 제왕절개로 모체에서 태아를 꺼냈을 때 울거나 호흡하는 태아를 죽였다면 살인죄가 적용될 수 있다. 이미 모체에서 사산한 태아를 꺼낸 것은 임신중지 시술에 해당돼 처벌 근거가 없다. 경찰은 ‘태아가 살아서 나온’ 증거를 확보하는 것이 수사 방향을 가를 관건이라고 보고 있다.
다만 2021년 판결은 살아나온 태아를 살해한 의사에게는 살인죄를 적용했지만, 산모는 처벌하지 않았다. 산모는 전신 마취 상태로 의식이 없어 수술이 진행되는 과정을 몰랐기 때문이다. 당시 재판부는 “(마취 상태의) 산모가 태아가 살아서 모체 밖으로 출산된 사실을 전혀 몰랐으므로, 죄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A씨도 제왕절개로 시술을 받았다면 마취 상태로 의식이 없었을 가능성이 높다. 경찰도 수사에서 A씨의 진술보다 병원 측 증거와 기록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경찰 관계자는 “(A씨는) 수사 결론이 임신중지로 나면 죄가 없는 분”이라고 말했다.
영상 논란되니 ‘칼 빼든다’는 복지부…‘고위험 임신중지’ 방치 현실은 달라지지 않아
A씨의 영상이 논란을 촉발시켰지만 실제 후기 임신중지는 병원에서 적지 않게 이뤄지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산모들이 위험이 큰 후기 임신중지 수술에 나서는 것은 ‘범죄는 아니지만, 제대로 정립되지도 않은’ 제도의 탓도 있다.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SHARE)’의 나영 대표는 “복지부는 낙태죄 폐지 후에도 임신중지에 관한 아무런 의료적 가이드라인을 내놓지 않았다”며 “처벌을 검토할 게 아니라 안전한 시스템을 갖추지 못한 책임을 통감해야 한다”고 했다.
‘태아가 죽어나오면 무죄, 살아나오면 살인’이라는 임신중지의 함정에서 산모들이 벗어나게 하려면 임신 초기부터 안전하고 수월하게 접근할 수 있는 의료 시스템을 갖춰야한다는 지적이 꾸준히 나온다. 김정혜 한국여성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우리 사회가 합법적 임신중지에 대해서도 불법으로 치부한 게 이번 사태의 본질”이라며 “복지부는 국회의 입법을 마냥 기다릴 게 아니라 먼저 건강보험·상담 체계·의사 교육과 관련한 정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예슬 기자 brightpearl@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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